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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0. 2021

힘들 때 나를 일으켜준 직장 선배의 말들

그 주옥과 같은 말은, 아마도 그 선배들의 넘어짐에서 오지 않았을까.

일로 만난 사이라는 벽


사람은 무엇을 목적으로 만나느냐에 따라 물리적, 화학적 관계가 형성된다.

형성된 관계는 그야말로 역동적이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보단,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다른 사람들은 내 맘과 같지 않고, 내 맘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다. 게다가 내 목적이 누군가의 목적과 상충할 때 삶은 철저히 고단해진다. 그 고단함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이것은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번지기까지 한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같아도, 달라도 사람과 사람은 갈등한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혼자 있어도 '나'와 갈등하는 게 사람이란 존재 아닌가.


오히려, 목적이 같으면 더 갈등하기 십상이다.

직장이 그렇다. 인생이란 담론을 압축하고 압축한 군상이 모인 곳. 먹고살아야 한다는 공동의 목적은 서로의 갈등을 오히려 증폭한다. 오히려, 직장은 갈등으로 굴러가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도적인 갈등 조성이, 아이러니하게 오늘도 회사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로 만난 사이는 일반적인 만남과 다르다.

때론, 이 사람을 직장이 아닌 곳에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직장에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사람도 밖에서 만났다면 맞장구치며 크게 웃는 사이가 될 수 있고, 직장에서 잘 지내는 사람도 개인적으로 만났다면 그만큼의 케미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직장에서 일로 만난 사이엔 뭔가 '벽'이라는 게 분명 느껴진다.

또 때론, 일부러 그 벽을 유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도 일로 만난 사이의 특징이다.


제3의 눈으로 바라본 나


벽을 두고 지내는 사이는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고단하게 하기 일쑤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는 것이다. 직장에는 '되고 싶은 나'와 '되어야 하는 나' 그리고 '되어진 나'가 있다. '되고 싶은 나'는 말 그대로 내가 추구하는 모습이다. '되어야 하는 나'는 맡은 바 업무나 직책을 개인적인 성향, 바람과 다르더라도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나다. '되어진 나'는 누군가에게 각인된 나다. 나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나. 즉, 제3의 눈으로 보여지는 '나'다.


이 세 가지의 괴리가 크면 직장생활이 힘들어진다.

반대로, 이 괴리를 줄이면 좀 더 나은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 괴리를 인지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여 무언가 노력한다면 이전보다 나은 나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지나 날을 돌아보면 이 삼박자가 어우러지지 않을 때 직장생활은 힘겨웠다.

나는 '되고 싶은 나'를 주장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되어야 하는 나'로 바라보기 일쑤고, '되어진 나'를 생각 없이 떠벌리고 다닌다. 그것들은 나에게 때로 상처가 되고, 또 아주 간혹 칭찬이 되어 나를 들뜨게 한다.


중요한 건, 이런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제3의 눈으로 바라본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고달픔이 이어진다.


슬럼프와 번아웃이 올 때마다, 나는 '되고 싶은 나'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힘들 때 나를 일으켜 준 직장 선배의 말들


슬럼프와 번아웃은 직장인을 초라하게 만든다.

바닥을 친 느낌이라 말하면 좋을 것 같다. 바닥을 치고 지하를 뚫고 내려가 어디까지 내려갈지 모르는 그 암담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그대로인데, 때로 나는 스타가 되어 있고 또 때론 역적이 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엄습한다.


이럴 때마다, 나에게 좋은 말을 들려준 선배들이 있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담아, 아마도 그 하루를 기어이 보내곤 했다. 주옥과 같은 그 말들을 정리하여, 다시금 힘을 내보고자 한다.


첫째, 많이 흔들려야 해. 불필요한 게 떨어져 나가도록.


구설수에 올랐다.

하는 일 족족 잘 되지 않았다. 조직 관리도 그렇고, 보고도 그렇고. 사람과의 갈등도 커졌고, 쌓아온 명성을 하루아침에 훼손당했다. 초라함과 자괴감,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고꾸라지는 내 인생 곡선은 떨어지는 칼날과도 같았다. 많이 흔들렸다. 그 요동이 심해 영혼의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이때, 존경하는 상사가 건네준 한마디가 있다.

"흔들려봐. 그거, 불필요한 게 떨어져 나가는 과정이야."


큰 위로였다.

그렇다고 덜 흔들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왜 흔들리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의미를 부여하니 나는 과연 무엇을 떨치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되었다. 적잖은 욕심과 욕망 그리고 잘못된 열정이 후드득 털려 나가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둘째, 사람을 볼 땐 장점을 먼저 봐.


"사람은 장점 세 가지와, 단점 세 가지가 있어. 그중에서 나는 장점 세 가지를 봐."

조직에서 내 평판이 좋지 않을 때, 유독 나에게 다가와 준 상사가 있었다. 다들 나를 좋지 않게 보는 이 시점에, 왜 나에게 이렇게 살갑게 대해 주실까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대로인데, 주변의 평판에 따라 나는 내 장점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다른 이의 장점을 보려 한다는 그분의 말을 빗대어 보면, 나는 나의 장점부터 봤어야 했다. 그러나, 마음이 힘들어지니 스스로를 구겨뜨리며 장점 따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있었다.


길을 지나다 독특하게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며 나는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상사의 말대로 장점을 보려 노력하니, 독특하고 개성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함'이 '멋'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다른 이의 장점을 발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내 맘을 밝게 했다.


다른 이의 장점을 본다는 것은 곧, 나의 장점도 상기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잘못되고 틀리고, 좋지 않은 모습에 집착하여 흠을 찾아내려 했던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나'이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을 가장 처음 받아들이는 것도 '나'다.

나는 오늘 좋은 것과 나쁜 것 중, 어느 것을 더 많이 봤을까?


셋째,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야, 원래 직장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

다소 냉소적이고 염세적이기도 한 이 말은, 오히려 내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과연 그랬다. 내 맘대로 되지 않은 것들 투성인 직장생활. 그러나, 때론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풀리는 것들도 있었다.


이 말을 들으니 무언가를 포기하고 체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기를 쓰고 해도 안 되는 일은 안된다. 노력하지 않아도 될 일은 또 된다. 욕심이나 욕망을 가지고 일을 하거나, 인정받으려 아등바등하면 할수록 그 결과는 좋지 않았던 기억이 더 많다. 오히려, 마음을 가벼이 가지고 무거운 마음 없이 포용하며 진행한 일들이 더 좋은 결과를 내기도 했다.


이는 직장생활뿐 아니라 우리 삶에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나는 믿는다.

정말이다. 세상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그러자,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에 대한 이분법적 생각도 놓게 되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릴 수 있으며, 그때가 맞고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 되는 일이 되는 일이 아니고, 안 되는 일이 안 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직장생활이란.

그리고 삶이란. 쉬우면서도 쉽지 않고, 어려우면서도 어렵지 않다.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일로 만난 사이. 벽을 두고 지내는 사이. 결국 먹고사는 그 목적이 같아 아웅다웅하는 사이. 그러나 직장을 벗어나면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사이. 그렇다고 다시 만나 굳이 친목을 도모하고 싶진 않은 사이.


그럼에도 갈등만 주는 사이이기보단, 내가 상사와 선배로부터 얻었던 그 통찰과 위로의 말을 나도 누군가에게 전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힘들 때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그 주옥과 같은 말은, 아마도 그 선배들의 넘어짐에서 오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심하게 넘어진 나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를 일으켜 줄 말을 해줄 수 있겠지란 희망이 생긴다.


우선, 넘어진 나부터 좀 더 일으켜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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