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라 포장할 수 없는 그것들과의 조우는 영 유쾌하지 않다. 어쩌면 이미 지워버렸어야 할 기억들의 파편은 여전히 날카로워 마음의 여기저기를 생채기 내고 만다.
남들이 본다면 그것들은 별거 아닌 것으로 둔갑한다.
그들에게 내 좋지 않은 감정과 아픔은 머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 또한 누군가의 아픔을 머리로 우선 인지한다. 내 지난 과거의 유사한 경험을 끌어올려 공감하려 노력하지만 그것엔 한계가 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다른 이의 아픔이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이입된 내 감정이 요동한 탓이다.
나를 울리고, 나를 우울하게 하고.
또 나를 미소 짓게 하고,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건 그러니까 다름 아닌 내 주관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지독히도 객관적이다.
주관이란 각자의 우주가 고개 들기라도 하면, 마치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세상의 망치를 얻어 맞고 만다. 그렇다고 나는 세상을 원망하거나 그것이 너무하다고 괴성을 지르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이라는 숫자가 올라가니 그러한 불만은 하등 필요 없으며 그래 봤자 남는 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주관을 지키는 방법은 세상이 나를 인정할 때까지 바락바락 우기는 게 아니라, 세상의 객관화에 동조하며 내 주관성을 고이 간직하는 것이다.
사람에겐 요상한 습성이 있어서 뚜렷한 주관을 내세우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나 상대적으로 인지하는 우리네 정서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저 나 스스로 행복하기보단 누구와 비교하여 만들어낸 행복과 불행이 오늘도 우리 주위에 만연하다.
세상에선 객관적인 척을 해야 한다.
먹고살기 위한 공식이자 의무다.
그러나 나 자신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주관성을 회복하고 유지해야 한다.
내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객관적인 척하느라 억압된 모든 주관적 감정들을 꺼내놓아야 한다.
그 과정이 물론 쉽진 않다.
마주하기 힘든 또 다른 나를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고통으로 잊는 게 차라리 낫다.
객관성으로부터 온 고통은 주관적 고통으로 무마해야 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마주하면, 당장은 괴로울지 모르나 스스로 치유되는 역설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나의 주관에 몰두할 때, 상상하지 못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지만 이후의 탈진은 왠지 모르게 후련한 이유다.
그렇다면 나를 가장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객관화로 희미해져 가는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리 힘들어도 나에게 빠져드는 고통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아마도 각자의 마음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그저, 글쓰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고통이라 말하고 싶다. 나에겐 글쓰기가 가장 주관적이자, 객관적인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방법이다.
오늘도 쓰기의 고통보다, 쓰지 않는 괴로움을 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에 나는 그저 안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