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의 '주체'와 '방향'을 알아야 한다.
착한 알고리즘은 없다.
시험이 코 앞이다.
공부를 해야 한다. 아직 시작도 못했다. 해야 할 공부의 양은 벌써부터 나를 압박한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나는 가만히 있다. 아니, 오히려 딴짓을 하고 있다. 관심 없었던 유튜브 동영상에 눈이 간다. 그저 한 번 터치했을 뿐인데 1시간이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거짓말처럼 지나간 시간은 알 수 없는 알고리즘 때문일 확률이 높다.
하나만 보자며 터치한 영상은 끝나기도 전에 나에게 다른 영상을 띄워준다. 그 영상은 지금 본 영상보다 더 재밌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결국 다음 영상을 선택하고, 터치하고,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벌써 저만치 가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착한 알고리즘은 없다.
알고리즘은 결국 나를 소비의 현장으로 이끈다. 아직 구매하지 않은 상품 배너는 죽을 때까지 따라올 기세다. 내가 본 영상과 유사한 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서 나를 터치하라고 말한다. 결국, 알고리즘은 시간과 돈을 소비하게 만든다. '알고리즘'은 원래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나 방법을 공식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즉, '계산을 실행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의 의미로 보면 된다.
문제는, 이 알고리즘을 택하고 활용하고 있는 주체가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주체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만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 또는 '기업'의 '문제 해결'은 '매출을 늘리는 것' 또는 '플랫폼 이용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내 손이 아닌 다른 주체의 손에 있게 되면, 결국 알고리즘은 나에게 착한 것이 아니게 된다.
'하위 욕구'에 더 쉽게 빠지는 이유
앞서 '상위 욕구'는 '하위 욕구'에 흔들린다고 언급했던 걸 기억할 것이다.
위계상으로 보면 말 그대로 '상위 욕구'가 더 위에 있는데, 왜 우리는 '하위 욕구'에 쉽게 넘어가는 걸까? 욕구 단계는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 있다. 피라미드는 하단이 더 넓고, 상단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단계로 보면 위에 있는 것들이 더 고상해 보이지만, 면적으로 보면 하단의 것들이 더 우세하다. 더더군다나, 하위 욕구가 만족되어야 상위 욕구로 갈 가능성이 더 크다.
'하위 욕구'는 '생존'과 연계되어 있다.
가장 하단의 '생리적 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욕구는 해소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위 욕구에 빠지지 않겠다며 먹지 않고, 자지 않으면 생명은 소멸한다. 소멸한 생명에겐 욕구가 무의미하다. 그러니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위 욕구에 익숙해져 있다. 이것을 거스르는 것은 생명을 거스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위 욕구에 더 쉽게 빠지는 이유는 또 있다.
'보상체계'가 그것이다. 우리네 인간은 '보상'이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된다. 시험 점수를 잘 받고자 하는 마음과 살을 빼고 멋진 몸매로 거듭나려고 하는 것 모두가 스스로에겐 '보상'이며 이것이 결국 우리를 다짐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머리와 마음에서 일어나는 보상의 메커니즘이다. 보상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나온다. 보상을 받는 긍정 결과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부정 결과 모두, '결과'의 단계에 접어들면 보상 관련 신경전달 물질은 분비를 멈춘다. 어떤 보상을 바라고 열심히 몰두했는데, 막상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마음의 헛헛함을 느끼거나 번아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보상회로는 더 크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위 욕구의 보상은 즉각 이루어진다.
배고파서 밥을 먹거나, 졸려서 자거나. 심심해서 동영상이나 SNS를 보게 되면 우리 몸과 마음은 즉각 반응한다. 이미 보상과 관련된 신경전달 물질은 '결과'를 맞이했으므로 분비를 멈춘다. 이것을 분비시키기 위해선 더 큰 자극이 필요하거나, 또 다른 과정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을 '단기 피드백 순환고리 (Short-term, dopamine-driven feedback loop)'라 한다. SNS나 유튜브는 이 '단기 피드백 순환고리'를 통해 우리로부터 돈과 시간을 거둬들이고 있다. 착하지 않은 알고리즘에 우리가 자꾸만 넘어가는 이유다.
반면,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데에는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10년, 20년 뒤에나 그것이 이루어질까. 기약 없는 기다림에 포기는 빨라지고 즉각적인 자극과 보상을 주는 하위 욕구에 빠져들게 된다. 한 달 후에 날씬해진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고, 지금 당장 눈 앞의 빵을 집어 드는 이유다.
정리하면, '하위 욕구'는 '생존'과 관련되어 있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욕구이며, 또한 즉각적인 보상을 받게 되므로 우리는 '하위 욕구'에 자동적으로, 아주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다.
'욕구'의 방향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다고 '하위 욕구'를 그저 나쁘게만 볼 건 아니다.
우리는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자아실현도 할 수 있다. 생존과 관련된 욕구를 경시해선 안된다.
다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내 욕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먼저 살피는 일이다.
알고리즘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모르던 욕구가 생긴다.
처음엔 생각하지도 않았던 영상을 보게 되거나,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게 된다. 알지 못했으면, 보지 않았으면 소비하지 않을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욕구'의 방향은 'Outside-in'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는 욕구다. 이것은 'Wants'로 표현할 수 있다. 필요하지 않아도 우리는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욕구'의 방향은 'Inside-out'이다.
이 욕구의 방향은 '나'로부터다. 적어도, 내가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Needs)를 아는 것. 더불어, 내가 왜 이것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소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떠한 '욕구'가 발생했을 때, 그 방향을 알아차리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꽤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누구와의 비교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해서 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알고 움직여야 한다. 사실, 집단주의 성격이 강한 우리네 정서에서는 남들이 하니까, 다들 그러하니까 나도 그래야 한다는 '욕구'가 생각보다 많다.
내 것이 아닌 '욕구'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내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것이 상위에 있는 욕구든, 하위에 있는 욕구든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우리는 각각의 단계를 거치게 될 것이고, 그 단계의 의미를 하나하나 배워나갈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주체가 되어 '욕구'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 '욕구'가 나를 점령한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욕구의 '주체'나 '방향'을 알지 못하면, 하위 욕구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내가 바라는 것들이 내가 된다.
나는 오늘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것은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