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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14. 2021

시작이라는 양면성 앞에서

'시작'이라는 양면성 앞에서더 이상주저할 필요가 없는 이유

야누스의 얼굴


'야누스(Janus/Lanus)'는 '문(Gate, Door)'과 '처음과 끝(Beginnings and dendings)'이자 '시작과 변화(Starts & changes)'를 상징하는 로마의 신이다.

연중 가장 첫 번째 달인 'January'도 '야누스'의 이름과 맞닿아 있다. 고대 로마에서 1월을 지칭하는 말인 '야누리우스(Lanuarius)'가 바로 '야누스'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야누리우스'는 한 해가 끝나고 다른 한 해로 들어가는 문을 지칭하는 고대 로마의 언어였다.


'야누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레 각자의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두 얼굴을 떠올린다.

그래서일까. 흔히 타인의 위선이나 이중성을 비판할 때 우리는 '야누스의 얼굴'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겉으로는 선한 얼굴을 하고 훌륭한 행동을 하는 것 같지만, 내면에는 악마적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을 비유하기 위함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대표적인 '야누스'의 산실(?)이다.


신화는 역설적으로 사람을 대변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고, 행동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사람과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또 오히려 더 유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즉, '야누스'는 우리네 모습을 여실하게 투영하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에겐 이중성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이중성'이 아닌 '삼중성', '사중성'을 넘어 '다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뒤바뀌는 내 마음과, 그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세상에 맞서야 하는 우리에게 '다중성'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중성은 다양성의 다른 말


야누스는 원래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문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그 얼굴이 앞 뒤로 기괴한 모습으로 붙어 있는 것도, 무언가를 지켜내는 수호신으로써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니까,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건 '반대'나 '대립'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보완'을 뜻하기도 한다. 시간성을 대입하여 보면 이것은 또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다는 말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과정'과 '결과'라는 말을 대입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야누스의 얼굴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남과 여, 행복과 불행, 유(有)와 무(無) 그리고 전쟁과 평화까지. 대립되는 것 같지만, 반대의 것이 없으면 아이러니하게도 존재할 수 없는 개념과 존재들. '동전의 양면'은 야누스의 얼굴을 닮았고, 야누스의 얼굴은 '동전의 양면'을 설파한다. '한 끝 차이' 또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표현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야누스의 얼굴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얼굴을 반대로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성은 부조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너무 이중적이야'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이중성'을 넘어 '다중성'은 우리의 생존 방식이다. 그렇다면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그 개념은 삶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려는 본능이며, 오히려 반대 방향을 보고 있음으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중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다양성'이 된다.


시작이라는 양면성 앞에서


그렇다면 다양성의 측면에서, '시작'이란 말을 곱씹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해내려 할 때, 시작에서 주춤한다. 또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작'이란 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원대함. 또 다른 하나는 초라함이다. 역시나 그 양면성은 일견 대립되어 보인다.


'시작'은 그 자체로도 원대하다.

그러나, '시작'은 언제나 초라하다.


그 둘이 양면성이 되느냐 보완성이 되느냐는 오롯이 우리에게 달려있다.

대부분의 시작은 원대한 충동으로 시작한다. 야심 찬 다짐, 머릿속에 이미 그린 성공이라는 결과에 가슴 두근거리며 한 걸음 나아간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고,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한 당장의 결과가 나올 수는 없다. 원대함에서 당장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 조급함을 빼면, 딱 그마만큼의 '초라함'이 남는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시작하고 그것을 꾸준히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초라함'에 압도되었을 때 그렇다.


'유튜브나 해볼까? 그래, 지금 당장 장비를 구비하고 영상편집 툴을 구매하고 시작해보자!'란 다짐에 영상 하나 정도는 올라갈 수 있지만 그게 그다지 이어지진 않는다.

시작이라는 원대함과 초라한 현실이 상충하며 나는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영상을 몇 올리지도 않았으면서도 많이 늘지 않는 구독자 현황을 보며 자괴감에 사무친다.


그러나 중요한 게 있다.

어찌 되었든 영상 하나는 만든 것이다. 시작이 된 것이다. 다른 영상이 한 달 후, 일 년 뒤에 올라갈 수 있지만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실버 버튼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유튜브 계정은 생성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야누스 얼굴의 반쪽은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원대함'과 '초라함'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원대함'은 '초심'과도 같다. 그것을 잘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초심'은 '왜'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10만 명 구독자수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는 것보다, '좋은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을 살자'라는 차원에서 '왜'라는 이유를 규명하면 동영상을 좀 더 꾸준히 오래 올릴 수 있다. '왜'라는 초심이 견고하면 구독자수가 당장 늘지 않는 '초라함'보다는, 생산자의 삶을 시작했다는 '원대함'에 더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야누스의 얼굴은 부정적인 이중성이 아니라, 일종의 '능력'이다.

내가 생각하는 능력은, 동전의 양면을 수용하며 그것을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동전을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다.


오늘도 내 마음 안에는 다양성이 뒤죽박죽 하다.

시작 앞에서 원대함을 느꼈다가 이내 초라해지고. 이내 초라해졌다가 다른 원대함을 꿈꾸고. 삶은 결국 뒤죽박죽 굴러가는 것이니 이를 받아들이고, 지금 무어라도 시작한다면 나에겐 뭐라도 남을 것이라 믿는다.


양면성은 '선'과 '악'의 대립 개념이 아니다.

불균형과 조화, 대립과 보완에서 오는 삶의 에너지다.


'시작'이라는 양면성 앞에서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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