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하다는포만감이 들때 찾아오는불안은, 그래서 나에겐 선물이다.
찰나의 간사함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여기 있을 때 저기를 보고, 저기 있을 때 여기를 본다.
얼마 만에 찾아온 마음의 여유일까. 아침에 눈을 떠 나를 짓밟는 부담과 삶의 무게는 아주 잠시 걷힌 듯했다. 살다 맞이하는 몇 안 되는 날. 몇 백 킬로를 완전 군장으로 걷다가 잠시 큰 짐을 내려놓은 것과 같은 그 후련함을 나는 만끽하기로 했다.
그러자 불안이 찾아왔다.
이래도 되냐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소란함으로 마음은 요동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정말로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져 있었다.
여유가 없을 땐 여유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주어지기만 한다면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무궁무진한 것들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여유는 나태함으로 변질되고, 실로 여유를 느끼는 시간은 찰나와 다름없다.
찰나를 오가는 초라한 존재는, 그래서 간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이 소란한 만큼,
더 분주해진다.
지난 몇 년 간은 삶에 있어 호락호락하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정체성이 흔들렸고, 내 쓸모를 자문했고 답을 찾지 못해 존재가 어수선하던 때. 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으로 그 어지러움을 정리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될 정도로, 나는 말 그대로 힘들었고 우울했다.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위독함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나는 온갖 고통을 내 우주로 끌어들여 그것에 뒤덮여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삶이 힘들 때를 돌아보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생산적이었다.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는 것처럼, 막다른 골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내 키보다 훨씬 큰 담을 올라 넘는 것처럼.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뭐라도 했던 기억이 난다.
썼다.
걸었다.
질문했다.
무어라도 생산하고자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막막하고 속상했던 그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 냈는지 믿기지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마음이 소란한 만큼 나는 더 분주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평안할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해냈고, 또 이루었다.
죽을까 봐 친 발버둥이 나를 살리는 것은 물론, 더 큰 성장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 힘든 시간을 버티며 썼던 글은 '견디는 힘'이란 책이 되어 나왔고, 하루 2만보를 걸은 내 몸은 자연스레 균형을 찾아가고 건강을 되찾았다.
스스로에게 던진 존재에 대한 질문은 생각의 틀을 넓혀 주었고, 이 과정에서 나는 많은 글과 강의안 그리고 제2의 삶에 대한 계획들을 쏟아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탈'이라는 말을 절대적 긍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탈이 나지 않는 삶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고통도, 무탈하여 군대도 정비하지 않은 그 순간 일어난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사고와 사건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방심에서 온다. 누군가에게 무탈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가급적 지양하는 이유다.
마음이 힘들 때를 기억할 것,
간사한 마음을 활용할 것
여유가 나태함으로 변질되었을 때.
나는 마음의 간사함을 활용한다. 저 너머를 본다. 죽지 않으려고 버둥대던 그때. 여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그때. 물리적인 여유는 둘째 치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 존재 자체가 힘들었던 그때. 쪼그라들던 마음처럼, 나 자신이 없어지면 어쩌지라고 벌벌 떨던 그때.
아이러니하게, 그 여유 없던 때에 나는 더 많은 걸 해냈으니.
나는 힘들 때를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유를 느끼고, 그래서 나태해지고.
무탈하다는 포만감이 들 때 찾아오는 불안은, 그래서 나에겐 선물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내 마음을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
애써 괴롭힐 필요가 없다. 어차피 삶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이 힘들었던 그때를 기억하여 나는 좀 더 분주해지면 된다.
더 활동하고, 더 생산적으로 돌변하면 된다. 어차피 여유와 행복이란 감정은 찰나다. 그것을 붙잡으려 하거나, 오래 간직하려 하면 할수록 삶엔 여유가 없어지고 (상대적) 불행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찰나에 내 인생을 걸고 싶진 않다.
다만, 그 찰나의 소중함을 알고 찰나를 맞이했을 때 그것을 만끽하려 한다. 내가 바라는 찰나는 절대 무탈할 때 오지 않는다.
무탈과 탈 남을 오가는 그 혹독한 과정에서 찰나는 많이 생성된다.
항상 잘 나가려 자신을 너무 불태우거나, 잘 나가지 못한다 하여 벌벌 떨기보다는. 잘 나갈 때 잘 나가지 못할 때를 바라보고, 잘 나가지 못할 때 잘 나가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
그래서 나는 여유가 넘쳐 나태해지는 이 지점에서, 숨 쉬기조차 힘들었던 그때를 돌아보는 것이다.
마음이 힘들었던 때를 기억해야 한다.
마음이 힘들었던 때를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나는 더 분주해질 수 있고, 더 많은 것들을 이루고 해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