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그렇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Theodore Roethke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중년을 한참 지나고 있다.
중년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삶은 언제나 이기적인 일방통행이다. 내 의사와 의견 따윈 안중에도 없다. 나는 그저 주어지는 시간을 게워낼 새도 없이 꾸역꾸역 다 받아먹어야 한다. 소화가 될 리 없다. 내 장담하건대, 세월과 나이는 평생 소화되지 않는다. 그 부작용으로 몸이 노후하는 게 그 증거다. 마치,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납으로 만든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는 젊음을 향수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젊음을 사고 싶다 말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허나, 이젠 억만금을 준다 해도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중년 정도 되었으면 그러한 제안을 할 존재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현실적 자각과, 또 하나는 지금의 중년이 너무나도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젊음을 시기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 들었다 하여, 젊음을 향유하는 존재에게 불만을 품지 않는다.
단.
내가 나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들에게 느끼는 시기와 질투는 '글쓰기'로부터 온다.
강의나 북토크를 할 때.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친구들을 마주하는데, 그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나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시간을 허비했으며, 또 이 친구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리도 젊은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했을까.
젊음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지만, 글쓰기는 젊음 스스로의 선택이자 노력이므로.
불혹이 지나 글쓰기를 시작한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해야 하므로, 자기 합리화란 자기 방어기제를 잽싸게 떠올린다.
"한 살이라도 빨리 시작한 게 어디야."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잘 시작했잖아."
"불혹이라는 나이를 지나쳤기에, 젊었을 때 많은 고생을 했기에. 그래서 글감이 많은 거야!"
자기 합리화는 언제나 꽤 효과가 있다.
한없이 부풀던 시기와 질투가 가라앉기 때문이다. 자기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는 정신승리를 가능케 한다.
그래, 어쩌면 그 젊은 날의 나는 글을 쓰지 않았지만 글감을 모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허황되고 허비했던 그 시간이 있었으므로 나는 지금을 채울 수 있는 게 아닐까. 분명 그렇다. 그 허비했던 지난날의 후회와 아쉬움을 담아 글로 써내면 될 테니.
나는, 다시 한번 더 나에게 그렇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
'글쓰기에 때늦음이란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