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 여러 국가에서 운전한 경험이 있는데, 운전이 쉽지 않은 범주로 볼 때 멕시코는 단연코 손가락에 꼽힐만하다.
흐릿한 차선과 울퉁불퉁한 도로,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고 차선을 변경해도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 문화.
도로 진입을 하기 위해선 마치 적자생존과도 같은 투박한 용기가 필요하고, 머리를 들이 미는 자가 우선순위를 쟁취하는 시스템이다. 면허 취득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정행위(청탁, 뇌물 등)를 막기 위해 2003년 면허 시험이 취소된 후 별도 교육 없이 도로 위를 달리는 사람들이 많기에, 언제 어디로 튀어 들어올지 모르는 버스와 오토바이들은 내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러다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를 하면, 낯선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창문을 두드리고 얼마의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 흔히 있지만, 이와는 다른 생경한 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저 구걸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묘기를 보여주며 온 노력을 하는 사람들.
#1.
아침 출근길.
신호에 걸리자 갑자기 다리에 긴 막대를 끼고 걸어오는 키다리 아저씨가 보인다. 그 위에서 중심을 잡기도 쉽지 않을 텐데, 현란한 저글링이 시작된다. 그 짧은 시간 저글링의 속도가 무르익어 갈 즈음, 그의 아들로 보이는 소년이 차들 사이사이로 돈을 받으러 다닌다.
#2.
저녁 퇴근길.
빨간 불이 켜지고, 옹기종기 차들이 신호 대기해 있는 그 순간.
윗옷을 벗은 한 남자가 나오더니 불붙은 막대를 입에 넣는다. 이내 알코올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불길은 차창을 뚫고 들어올 기세다. 땀에 흠뻑 젖은 그 사내는 신호가 바뀌기 전 차들 사이사이로 관람료(?)를 내라는 눈빛을 보내며 분주히 움직인다.
#3.
주말 낮 시간.
한국 식당이 많은 멕시코 시티 소나로사를 지날 때. 정차한 차 앞으로 어린아이 두 명이 무대(?)에 오른다. 딱 봐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재주를 넘는다. 차도라 위험해 보이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아주 익숙하게, 저들의 공연을 잘 마무리해낸다.
이밖에도 다리 한쪽 없이 목발을 짚은 소년이 축구공 트래핑을 하고, 몇 시간을 들여했을 광대 분장 속 어떤 이가 춤을 추며 공연을 한다.
이 공연을 즐기라는 듯, 음료수와 먹을 것을 파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그들에게 동전 몇 닢을 주고 싶지만 선뜻 그러하지 못한다.
나를 비롯한 주재원들은 방탄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창문을 잠시 열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운전할 때의 그것보다 크다. 해서, 안타깝지만 그 훌륭한 공연을 보고도 나는 그 값을 지불하지 못한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에 시선을 일부러 다른 곳에 두기도 한다.
멕시코는 중남미 최대의 경제규모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 불평등은 다른 제3세계 국가 못지않다. 1억 명이 넘는 멕시코 인구 중 60~70%가 빈곤층으로 분류되고 그중 3천만 명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하루를 연명한다. 그 때문에 미국은 그리도 높은 장벽을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세워 놓은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약 4,000km에 이른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이민자를 막으려는 미국의 노력(?)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고통받는지 알 수 있다.
2003년만 해도 멕시코의 경제규모는 한국보다 컸다.
그러나 부의 편중이 심화되면서 국가의 전반적인 발전이 더뎌졌다. 멕시코는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약 53%를 보유하고 있다. 멕시코 인구 절반이 버는 것보다 약 18% 많은 수준이다.
멕시코는 이미 1993년에 OECD 국가에 가입했다.
그러나 소득 분배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보면 (*지니 계수는 0~1까지 수치로 표현하는데, 0에 가까울수록 소득 불평등 정도가 낮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심하다. - 작가 주 -) 0.458로 상당히 높다. 참고로 한국은 0.3555, 미국은 0.390, 네덜란드는 0.285다. (출처: 한국 통계청)
물론, 어느 나라나 빈부격차는 존재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도 이와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격차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격차가 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네에겐 그리 유쾌하지 않은 관념이자 경험이기 때문이다.
도로 위의 서커스는 바로 이 빈부 격차에 기인한다.
그 격차가 크기에, 없는 무대를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은 기어이 공연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노고와 수고에 마음 깊은 곳에서의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하루를 생각하면, 어쩌면 내 하루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