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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08. 2021

라면에 나초를 넣은 이유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제대로 이곳에적응해야겠다는다짐

집을 떠나면 서러움이 군대와 같이 몰려온다.


게다가 가족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 군대는 세를 불린다.

멕시코에 부임한 지 약 3주째. 길고 긴 호텔 생활을 뒤로하고 들어온 새 보금자리. 가족은 몇 개월 후에 올 예정이므로, 나는 새로운 집에 가득 차 있는 낯섦과 공허함을 온전히 머금어야 한다. 허공에 떠다니는 그 기운들은 마치 습기와 같아서, 메마른 내 마음은 제습제가 되어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것들을 빨아들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텅 빈 집에는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모를 지경이다.

들고 올 땐 크고 버겁던 이민가방과 캐리어 몇 개는, 공허한 집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짐을 풀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적막함은 가득하고, 그 이상으로 그리움과 서러움은 공존한다.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

몸도 마음도 으슬으슬한 멕시코 시티의 여름은 뜨겁고 매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기에 딱이다.


무얼 먹어야 할까.


충분한 식기도 없으니 거창한 요리는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라면이다. 먼저 부임한 후배가 챙겨준 냄비와 숟가락 세트. 그리고 라면. 지금 이 순간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다.


라면은 한국인의 소울 푸드다.

몸을 뜨끈하게 하고,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뜨근한 몸과 푸근한 마음은 한국과 가족을 향수하게 한다. 제습제와 같이 빨아들이던 외로움의 기운들은 잠시나마 희미해진다. 텅 빈 집에서 홀로 일어나 코를 훌쩍이는 나에게 이마만큼의 명약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치피 이곳에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한국을 향수하기만 하는 건 가당치 않다.

프로페셔널의 마음으로, 감사한 기회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선 이곳에 적응해야 한다. 더더군다나, 가족이 온다면 내가 이곳에서 먼저 현지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는 나와 가족의 먹고사니즘을 온전히 챙길 수 있다.


허기짐을 달래려 사두었던 나초가 보였다.

한국인에겐 밥. 멕시코 사람에겐 나초. 그렇다면 한국에 대한 향수와 이곳에서의 삶을 다짐할 수 있는 최적의 조합.


갑자기, 호텔 조식으로 먹었던 칠라낄레 (Chilaquiles)가 생각났다.

매콤한 국물로 덜 낯설게 나를 맞이해 준 칠라낄레


매콤한 빨간색 수프에 흠뻑 빠진 나초.

그 위에 쫄깃한 소고기. 멕시코 사람들의 뜨끈한 아침식사이자 해장 음식으로도 인기 있는 그 맛은 일품이다. 그 맛의 기억이 좋아서였을까, 나는 선뜻 라면에 나초를 넣을 용기가 생긴 것이다.


수프와 함께 물을 올린다.

물이 끓으면 라면을 넣는다.

어느 정도 라면이 익으면 면을 건져낸다.

끓는 물에 나초를 넣고 얼마간 끓여 준다.

다시 그 위에 건져냈던 면을 넣은 뒤 조금 더 끓인다.


그러면 나초 라면이 완성된다.


한국인에겐 밥, 멕시칸에겐 나초!


그 맛은 내 마음가짐 그대로다.

라면의 매콤하고 뜨끈 시원한 맛이 향수하는 몸과 마음을 달랜다. 훌쩍거리던 감기 기운도 싹 사라진다. 이어, 국물에 풀어진 나초를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훌륭하다. 맛도, 다짐도.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다. 다시 용기가 생긴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는 열심히 부딪히며 공부하면 되고, 낯선 업무는 누구보다 잘 꿰차면 되겠다는 결심이 선다.


라면에 나초를 넣길 잘했다.

한국을 향수하되, 용기 내어 이곳에서의 삶을 다짐하기를 잘했다.


초심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이 공허해질 때마다.

철없는 슬럼프나 번아웃이 올라오려 할 때마다.


이렇게 라면에 나초를 넣어 먹자고 나는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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