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넓어진 마음 앞에서 우리는 한걸음 더, 기특하게 성장해 있을 것이다.
직장에 있는 지옥은?
'신과 함께'란 웹툰과 영화를 보면 살인 지옥, 나태 지옥, 거짓 지옥, 불의 지옥, 배신 지옥, 폭력 지옥, 천륜 지옥이 등장한다.
모두 저마다의 죄를 묻고 형량을 정하여 벌을 받게 한다. '지옥'이란 땅에 있는 옥을 말하는 바, 우리는 선한 자는 하늘로 악한자는 땅으로 간다고 믿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잣대로 보면 직장 내에서 하늘로 갈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자신들은 하늘로 간다고 말할 사람이 수두룩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를 지목하여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그 즉시 땅 아래를 가리키거나.
그러나 나는 직장에 이미 지옥이 하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존재는 바로 '질투 지옥'이다. 이 지옥은 아주 무섭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지옥은 다른 누가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만들어 놓지 않았지만, 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지옥.
나만 알고 있는 지옥.
그래서 더 무섭다.
'질투'는 나쁜 것인가?
그렇다고 나는 '질투'가 '나쁜 것', 즉 '악(惡)'이라고 보지 않는다.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개인 심리학을 주창했는데, 그 핵심은 바로 '질투' 그러니까 '결핍'이다. 결핍을 느낀 한 개인은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해 더 노력하고 그로 인해 성장해간다는 게 그의 이론이다. 실제로 그는 어렸을 때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을 연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잘난 사람,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꽤 큰 자극을 받는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보다 성과가 나지 않는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모두가, 언제나 이렇게 아들러의 이론처럼 질투와 열등감을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면 수많은 직장인들이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질투'와 '열등감'은 어찌 보면 가장 상하고 변질되기 쉬운 감정이다.
질투의 힘이 세 질 때, 그것을 이겨낼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묻고 싶다. 더더군다나 직장에선 모두가 동료이자 경쟁자다. 이보다 더 잔인한 조직이 또 있을까? 마치 고대 로마 시대에 검투사들이 이겨야 살아나갈 수 있는 콜로세움과도 같다.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
나보다 잘나지 않은 사람 같은데.
내가 저 사람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는데.
저 사람이 한 거라곤 회식 때 테이블 위에 올라가 노래 부른 게 다인데.
나를 제치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보며 투덜거리면, 그렇게 스스로 지옥에 기어 들어가게 된다.
결핍으로 성장한다는 이론은 사치다. 격하게 올라오는 내 감정과 상한 기분은 아들러도 어찌할 수 없다.
결국, 질투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 질투가 어떤 의미인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지옥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자,
마음이 넓어졌다.
나는 지옥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불편하면, 그게 바로 지옥 아닐까?
질투에 눈이 멀어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비하하고, 제대로 해내지 못해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며 한탄하는 그 마음과 상황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자동차 도로에선 언제나 내 차선만 느리다.
옆 차들은 쌩쌩 잘도 달리는데, 내가 선택한 길은 요지부동이다. 그래서 차선을 바꾸면, 또 내 차선만 느리다. 운전이 원래 그렇다. 인생이 원래 그렇다. 직장이 원래 그렇다. 아무리 경적을 울리고, 소리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핸들을 내리쳐봐야 변하는 건 없다. 그 순간 차 안은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교통 체증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옆 차가 더 빨리 간다고 질투하면 기분만 상한다. 오히려 더 일찍 나오지 않은 나를 돌아보아 더 나은 다음을 기약한다. 또는 그동안 밀렸던 어학 공부를 위해 원어민 오디오를 틀거나. 그러면 그곳은 지옥이 아닌 학습의 현장이 된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그저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인정하기로 했다.
운이 좋아서,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일은 못하는데 정치만 잘하거나, 회식 때 노래방 테이블 위에 올라가 열창을 하며 점수를 따는 사람들. 그 모든 게 실력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히려, 내가 저러지 못해 질투를 하고 있었구나란 걸 깨달았다.
내게도 운이 따르고, 내게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고, 정치에 능수능란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그들에 대한 질투는 내 영혼을 갉아먹는 비겁함의 다른 말이었다.
바다에 가면 마음이 확 트이는 걸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힘들 때 바다를 떠올리는 이유다. 그곳에선 마음껏 소리칠 수 있고, 무엇보다 내 모든 것을 받아줄 것만 같은 그 광대함과 웅장한 파도는 우리네 마음을 무장해제시켜 놓는다.
그 순간의 마음.
좁아졌던 마음이 무장해제되면서, 빗장이 열리는 그 순간. 직장이라는 조그마한 건물 안에서, 그렇게 스스로의 지옥에 빠져 아등바등하던 내 모습은 그저 허탈한 어린아이 투정과도 같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
질투라는 지옥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 것.
그 지옥에 빠져 있다면 다시 박차고 나와 나를 돌아보는 것.
모두, 내 마음이 넓어지면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마음이 불편하면 그게 바로 지옥이다. 스스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그 불구덩이로 빠져들어가기보단, 답답한 마음이 들 땐 내 주위 모든 걸 인정하고 잠시 바다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그 넓어진 마음 앞에서 우리는 한걸음 더, 기특하게 성장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 다른 차가 아닌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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