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유첨 파일!
공을 들여 쓴 장문의 메일.
수신자엔 직급이 높은 사람도 있고, 내 승진과 급여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좋아해 주는 후배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적들이 공존한다. 그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모두에게 알려야 하는 중요한 내용이니만큼 나는 메일을 여러 번 읽어 보고 비장한 각오로 'Send' 버튼을 누른다.
그 순간.
그러니까, 버튼을 누르고 PC가 신호를 받아, '아 이 사람이 나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나는 이것을 1과 0으로 분해하여 받는 사람들에게 다시 텍스트로 환원해줘야지'라고 서버로 그 내용을 송부하는 찰나의 시간.
앗, 유첨 파일!!!
그제야 나는 필요한 자료를 첨부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만다. 송부된 이메일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미 메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송이 된 후다.
스스로 머리를 내리치고 싶은 이 순간은 20년의 직장생활에도 고스란하다.
'한결같다'라는 말을 갖다 붙이고 싶은 건 이러한 상황이 아닌데, 상황을 보면 참 한결같으니 마음은 착잡할 뿐이다.
실수는 어디에서 오는가?
전후반에 승부를 짓지 못하고 마침내 마주한 승부차기.
선수 한 명 한 명이 고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지만, 분명 그중엔 골대 밖으로 공을 차는 선수가 있다. 공 차는 것이 직업인 그들에게도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그 실수는 늘 따라다닌다.
직장인은 누구보다도 더 프로페셔널한 존재다.
전문직과 비교하거나,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회사를 보며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릴지 모르지만 엄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하며 돈을 받으니 '프로'라 아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실수'라는 측면을 봐도 그렇다. 직장인의 하루 중,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날이 얼마나 될까? 하루에도 몇 번씩은 아마도 골대 밖으로 공을 차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수는 어디에서, 왜 오는 걸까?
우리는 보통 실수를 하고 나면 '정신이 없다', '정신이 나갔다'라고 말한다. 또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라고 말하거나.
오늘 아침.
다른 날보다 10분 먼저 나선 아침은 왠지 보람되었다. 직장인에게 아침 몇 분은 다른 때의 몇 시간과도 같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도착한 사무실에서 무얼 할까 생각하던 나는, 지하 주차장에 이르러 차 키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10분 일찍 준비가 끝난 그 상황에 취해, 말 그대로 정신이 없던 모양이다.
그 순간을 되새겨보니, 실수는 결국 단계를 따르지 않고 생각이 저만치 더 나간 그 지점에서 생겨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신이 없거나, 나갔거나, 딴 데 팔리거나. 그 모든 건 현재와 과거 또는 미래 어느 시점과의 괴리에서 오는 것이다.
마치 그림자를 앞서가려는 어리석음을 삶이 꾸짖어 주듯이.
했던 실수를 반복할 때 돌아봐야 할 것들
오랜 직장생활을 해오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늘 실수한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서 헛웃음을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예전과는 분명 달라야 한다. 주니어 때의 실수는 용납이 안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내 경력과 평판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같은 실수가 반복될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나는 다음의 것들을 상기하고 점검한다.
첫째, 빨리 손에서 일을 떨쳐 내야겠다는 생각
아이스크림 바를 먹다가 그것이 녹아내려 손에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손은 이내 끈적끈적해지는데, 나는 이것을 잠시라도 참지 못한다. 물티슈를 찾아 닦거나, 화장실로 뛰어가 어서 빨리 손을 닦아야 한다. 전후 사정 고려하지 않고 끈적한 그 느낌을 없애야겠다는 단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다. 아이스크림의 맛을 즐긴다거나, 지금 집중해야 하는 일은 까맣게 잊는다.
일을 하다 보면 마치 손에 묻은 끈적함과 같이 빨리 떨쳐 내고 싶은 일들이 있다.
보고 기한에 몰리거나, 내가 끝내지 않으면 전체 Process가 멈추거나, 이것만 하면 퇴근 또는 꿀 같은 연휴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때. 일은 그야말로 바로 씻어버리고 싶은 마음의 끈적함이 된다.
그러다 보면 일을 빨리 떨쳐내고픈 마음에 사로 잡히고, 그 결과물엔 어김없이 실수가 개입한다.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엔 수많은 오타가 있거나, 앞 뒤가 맞지 않는 로직의 부조화가 셀 수 없다. 더 절망스러운 건, 그 일을 작업할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 손을 떠났을 때 기어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란 후회는 더 이상 소용없다. 그것은 마치 손끝의 끈적함을 성급히 씻어내려다 테이블을 건드려 시럽 한 통을 쏟은 것과 같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끝내야 하는 일을 할 때.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일을 잘 마무리하기 위한 마음인지, 아니면 빨리 떨쳐내려 하는 것인지를.
둘째, 일의 마무리는 글쓰기 퇴고처럼
나는 퇴고의 중요성을 잘 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 쓴 글을 보면 내가 쓴 글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달라 보인다. 맞춤법은 군데군데 틀려있고, 맞지 않는 앞뒤 문장은 내 글쓰기 실력을 의심케 할 정도다. 써 내려갈 땐 몰랐던 것들이 퇴고의 과정에서 하나 둘 튀어나오는 것.
일도 마찬가지다.
유관 부서에서 시비조로 날아온 메일에 온갖 감정을 담아 욕에 준하는 문체로 답장을 한 적이 있다. 그 결과는 뻔하다. 누가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둘 다 이상하고 하수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경우 퇴고의 여지를 남긴다. 퇴고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리 내어 읽거나 시간을 두고 다시 보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염불 외듯이 소리 내어 그것을 읽기란 쉽지 않으니, 나는 잠시 메일 보내기를 멈추고 커피 한 잔 후에 그 메일을 다시 본다.
점차 누그러진 감정 사이로, 이성의 끈이 다시 연결되고 나는 차분히 그 메일에 답을 한다.
이제는 누가 봐도 시비를 건 사람이 이상한 내용이 되고, 나는 내부 규율에 맞게 정당한 요청과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된다.
퇴고는 죽은 글도 살린다.
메일뿐만 아니라, 각종 보고서도 마찬가지. 일의 마무리를 퇴고와 같이 하고 나면 한결 나아진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실수는 바로잡아지고, 그로 인해 발목 잡힐 일들은 확연히 줄어든다.
죽었던 내 역량과 평판도 살려낼 수 있을 만큼.
셋째, (시작부터) 하기 싫어하기보단, '하면 되지 뭐...'란 자세로
회사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간혹(아~주 간혹) 알아서 신명 나게 일하는 경우가 있긴 하나 우리네 직장인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아무래도 '하기 싫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에서 오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은 대개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온다.
또는 그 결과를 잘 만들어내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부터 기인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 리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멍청한 팀원을 데리고 일하는 것보다, (일) 하기 싫어하는 팀원 데리고 일하는 게 더 힘들어...!"
나는 그 말에 흔쾌히 동의한다.
내가 일하기 싫었을 때를 돌아보면, 대충대충 일을 하는 것은 물론 변명에 변명을 거듭하다가 거짓말할 준비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시작부터 하기 싫다는 마음으로 했던 일들의 결과물은 내가 봐도 그 질과 완성도가 떨어졌다.
그렇다고 '할 수 있어!'란 말로 내 마음을 달래기엔, 진실성이 부족하고 공감이 안된다.
그럴 땐, '하면 되지 뭐...'란 말로 나를 추스른다. 그러면 거짓말 같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시작은 반이 되어 하기 싫은 마음으로 했던 일과는 큰 차이를 보이며 성과를 낸다.
하기 싫어서 했던 일엔 항상 실수가 덕지덕지 한데, 마음가짐을 달리하고 임한 일엔 실수가 그리 크게 기지개를 켜지 못한다.
직장인은 실수를 달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다.
완벽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그래야 직장인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더 많고 더 긴 월급을 받아낼 수 있다.
실수가 반복되어 실력이 되지 않도록.
실수가 쌓이고 쌓여 내 평판이 되지 않도록.
반복되는 실수의 시그널이 보인다면, 위 세 가지를 떠올려 보는 게 좋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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