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어쩌면 더 큰 개념의 학교일 수도 있겠다.
입사를 한다는 건 사회생활에 한 발을 내딛는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어른 이전과 어른 이후를 구분하는 확실한 잣대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입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이 아닌 건 아니다. 어른을 '생물학적 어른'과 '사회적 어른'이 있다고 한다면, 입사와 동시에 우리는 '사회적 어른'이 된다는 의미다.
어떤 사람을 일컬어 '어른'이냐 칭하는지는 분분한 의견이 많다.
그러나 나는 '책임'으로 그 기준을 가른다. 나 하나를 건사하든, 가족을 먹여 살리든. '책임'이라는 삶의 무게를 느낄 때, 사람은 '어른'이 된다.
책임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짊어진 무게를 감당한다는 말이다. 원하지 않아도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뜨고, 인정보다는 욕을 더 많이 먹으면서도 괜찮은 척해야 한다. 좋게 말하면 의젓함이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이 모든 건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분을 삭이는 기술이다. 그래야 월급이 끊기지 않으며, 그래야 무언가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직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더랬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업무, 과정은 없고 결과만 난무하는 삭막한 우주, 좋은 사람은 금세 없어지고 악마라 생각한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이상한 나라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정답은 절대 찾아볼 수 없는 합리적이지 않은 생태계.
그래서일까.
20여 년간의 직장생활은 하루하루 새롭다. 직장인은 반복의 아이콘인 것 같지만, 그 '반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반복이 아니다. 지겹도록 일어나고 닥쳐오는 것들에 익숙해졌을 법한데도 그러하지 못한다.
이른 아침 아이들이 눈을 비비벼 힘겹게 학교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부러웠다. 그 나이 땐 학교 가는 게, 공부하는 게 그토록 싫었는데. 지금 보니 아름다워 보인다. 아마도, 학생 때는 몰랐던 직장인의 세계를 맛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인의 맛을 보고 나니, 그때가 그리워지는 기성세대의 푸념이기도 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회사와 학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내키지 않아도, 죽도록 싫어도 회사를 가야 하는 이유다. 회사에서 받는 돈, 그러니까 월급은 항상 충분하지가 않다. 월급을 많이 받든 적게 받든, 월급쟁이는 매월 100만 원이 적자란 말이 있다. 금액의 경중은 있겠으나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그리고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정통으로 꿰뚫는 한 문장이다.
그럼에도, 일정의 돈을 받는다는 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극명한 기준이다.
회사에서 하는 실수와 학교에서 하는 실수는 그 질이 다르다. 학교에서의 실수는 만회할 가능성이 좀 더 있다. 회사에서의 실수는 냉정하게 처리된다. 축구 동호회에서의 실수와 국가대표 경기에서의 실수는 같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돈을 낼 때보다 돈을 받는 지금이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
학생에게 방학이 쉼표라면, 직장인에겐 그것이 없는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을 해야 한다. 간혹 휴가라는 쉼표 비슷한 게 있어 보이긴 하지만 성과나 회사 문화에 따라 휴가의 온전함은 롤러코스터를 탄다. 즉,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순간이 평가다.
한번 삐끗하면 발목을 잡히거나, 상사의 눈에 나 삶이 고달파진다. 대답을 잘해야 하고, 행동도 상황에 맞게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시험과도 같다. 문제는 시험기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시험 범위도 없다.
매 순간을 말 그대로 '잘'해야 하는 것이다.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건 절대적이지 않다. 아니,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지난번에 한 말과 행동이, 이번에도 유효하리란 법이 없다.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선배가 좌천되고, 설마 저게 정답일까 생각했던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학교엔 정답이 난무한다.
'정답지'도 있다. 문제를 풀다 정말 모르겠으면 답을 찾아봐도 된다. 그러나 회사엔 정답이란 없고, 정답이라 믿었던 것들이 오답이 되며, 오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답이 된다.
이로써 내 가치관은 흔들리고, 나만의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다지고 또 다진다.
입사와 함께 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고, 멋지게 프레젠테이션을 해 박수와 인정을 동시에 받을 줄 알았다.
학교에서 나는 아이디어도 많았고 발표도 잘했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란 곳엔 그러한 인정과 박수는 없다. 풋내기의 아이디어는 묵살되기 일쑤였고, 발표하며 받는 질문들은 대답을 못할 때까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마치 한 무대 위에 올라 무언가에 난도질당하는 기분. 이제는 인정과 박수는커녕,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서로를 인정하고 응원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겉으로는 그러해 보여도, 모두 각자의 인정을 위해 고군분투할 뿐이다. 회사에서의 인연은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네 밥그릇과 네 밥그릇의 만남이자 갈등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인정하고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은 학교에서보다 훨씬 더 적어지게 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등수와 성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문화는 우리네에게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그러나 회사는 학교보다 더 철저하게 결과를 지향한다.
과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성과에 따라, 숫자에 따라 사람은 '판단'된다. 그 '판단'의 결과는 '연봉'과 '승진'의 결괏값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과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 더 많은 연봉과, 더 빠르고 높은 승진을 거머쥐느냐가 관건이다.
'열심'과 '착함'은 결괏값 앞에 무용지물이다.
결괏값이 그 과정을 증명하고 대변한다.
때문에, '억울하다'란 감정은 직장인에겐 사치다.
억울하면 결괏값을 잘 만들어냈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선 정답을 찾느라 무언가가 꽉 막힌 기분이었는데.
회사에선 정답을 찾지 못해 삶이 고단하다.
간혹, 누군가 정해 준 정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패턴이나 예상 가능한 삶이라면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겠으나,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수십 년을 다녀도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회사생활은 매일매일 풀지 못하는 시험문제와도 같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학교에서의 것보다 더 큰 배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돈을 낼 때보다 돈을 받으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생각해보니 회사는 어쩌면 더 큰 개념의 학교일 수도 있겠다.
다만, 학교에서는 선생님 한 분에 학생이 여럿이지만 회사엔 각양각색의 선생님들이 있다. 나이가 더 많건 어리건, 경력이 더 길든 짧든. 모두가 내 스승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내일도 한수 배우자 생각하며 나는 새벽 6시 알람을 맞춘다.
내일은 통근이 아닌 통학을, 출근이 아닌 출석을 한 번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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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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