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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Oct 13. 2021

글쓰기에 진심인 이유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글쓰기는 그것을 느껴라 말한다.

존재의 희미해짐에 대한 두려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침의 연속이었다.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는 가련한 존재는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참으로 신박한 무엇이었다.

'나는 왜 이리 소비적으로 살고 있는 걸까?'


이전엔 그와 같은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하지 않으면 도태될 거란 두려움은 내 눈을 가렸고, 생각을 정지하게 했으며, 마음을 돌아볼 여유를 앗아갔다.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게 아닌데 점점 더 허무해지는 마음과 초조함에 사그라드는 몸뚱이가 그저 초라해 보였다. 초라함은 다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존재를 풍전등화로 내몰고 만다. 내가 그때 느꼈던 무서움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타들어가는 소비적인 존재. 또는 존재의 소모.

사람은 본능적으로 존재함을 느끼고 확인하려 알게 모르게 발버둥 친다. 한 시를 쉬지 않고 숨을 쉬어야 하는 이유다. 숨을 멈추면 존재는 사라진다. 사라진 존재는 이내 소멸한다. 소멸에 대한 공포와 불안함은 기어코 살아 있는 것들에게 숨 쉬라고 말한다.


숨 쉬는 것을 잊는 이유.
설렘에만 의존하는 우리.


그러나 숨 쉬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그것은 반복이기 때문이다. 반복은 소중하고 특별한 것도 평범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숨 쉬는 것 이상의 것. 가슴 설레고 마음이 쿵쾅대는 무언가를 좇는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이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설렘으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설렘으로 그 끝을 맺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설렘은 일시적이므로 끝까지 유지되지 않는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이 미약한 이유다. 더 이상 설렘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설렘의 시작이 그 끝을 책임져 주리란 생각은 금물이다.


다시 앞의 신박한 질문으로 돌아가.

나는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또 다른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생산하면서 살 순 없을까?'


보도 듣도 못한, 생각해보지도 던져보지도 않았던 더 신박한 질문이 앞의 질문을 맞받아쳤다.

내가? 내 주제에? 자본도 없고, 회사일에 허덕이는 내가?


그럼에도 더 이상 소비적이고 소모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마음이, 어떻게든 답을 찾아보라고 나를 종용했다.

감당 가능한 도전. 시작하기에 만만한 무엇. 결론은 '글쓰기'였다. 배워본 적도, 써본 적도, 꾸준하지도 않지만 꺼져가는 내 존재를 다시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글쓰기는 숨 쉬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사실, 글쓰기의 시작엔 설렘이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하지 않으면 존재가 사라질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쓰게 만든 것이므로 어쩌면 글쓰기의 첫맛은 달달했던 게 아니라 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맹맹한 맛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달달하지 않고, 설레지 않았던 그 시작이 지금껏 나를 쓰게 하고 있는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달달함과 설렘에 취해 시작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더 좋은 건, 글쓰기기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항상 설레고, 마음이 쿵쾅 거릴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나에게 숨 쉬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나는 글을 쓰며 내가 숨 쉬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인인데 글쓰기를 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고 묻는다.

이럴 때 나는, '저는 글로 숨을 쉽니다.'라고 말한다. 멋있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그러하기 때문이다. 삶이 나를 힘들 게 할 때, 왜 사는지 그 이유를 꽁꽁 감출 때. 나는 설레는 무엇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있음을 돌아보려 한다.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대개 자극적이며 소비적이다. 그러나 숨 쉬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건 고요하고 묵직한 것들이다. 


숨을 고르고, 한껏 그것을 들이 마시니.

보이지 않던 게 보인가. 깨닫지 못한 것들을 깨닫는다. 확실히는 아니더라도 내가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하나 둘 알아 간다. 그것을 더 캐내고 나누기 위해 나는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은 실재하는 생산물이다.

더불어 '글'은 창조물이다.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므로, 모르던 것을 알게 하는 것이므로. 기록으로 남는 것이니 그 누구도 이것을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내가 글쓰기에 진심인 이유는 살기 위해서다.

살아야 존재를 확인하고 느낄 수 있다. 존재를 확인하고 느낄 수 있다면 잘 살 수 있다. 잘 산다는 건, 매일의 내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소비를 한다.

존재함을 느끼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생각해보면 좋다. 이것을 할 때 기분 전환이 되고, 이것을 할 때 힐링된다는 느낌은 돈과 물질로 환산되거나 환원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존재와 생산.

생산과 존재.

그리고 숨쉼.


글쓰기에 진심인 이유다.

그 이유가 오늘도 나에게 무언가를 쓰라 말하고, 숨 쉬고 있음을 그저 느껴라 하며, 그것을 나누라고 종용한다.


진심은 언제 어디서든 통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하므로 오늘도 나는 쓴다.


내 삶을.

내 숨을.


덧)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쿵쾅거린다면 병원으로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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