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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06. 2021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라는 강렬하고 통렬한 신호다

강렬하고 통렬한 그 신호는 다름 아닌 '나'를 위한 것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훅 올라온다.

훅 올라온 그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부터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왜 급발진한 것일까?


우리 삶을 돌아보면 이해가 쉽다.

우리네 사회는 우선 뛰라고 말한다. 빨리 학교 가고, 빨리 졸업해서, 빨리 돈 벌고, 빨리 은퇴하는 삶. 숨이 목이 아닌 머리까지 차오르고 우리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뛰고 또 뛴다. 남에게 뒤질 새라, 누구에게 비교당할 새라. 방향도 모르고 뛰고 마는데, 어쩌다 어느 끝에 다다르면 그곳이 결승점이 아니거나 결승점이라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놓고 왔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더불어, 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게 된다.

남자, 여자, 엄마, 아빠, 친구, 가족, 직장인, 사업가, 주부 등등. 그것도 하나가 아닌 수 십, 수 백 겹의 가면을 쓰게 된다. 중요한 건, 그 대부분의 페르소나는 '자의'가 아닌 '타의'라는 것이다. 뛰는 것도 숨이 찬데, 마스크 하나만 덧쓰고 있어도 헥헥거리는데. 너무나 많은 사회적 가면을 쓴 나 자신은 얼마나 숨이 찰까? 게다가 스스로를 돌아볼 새도 없이 우리는 그 가면의 역할을 해내야 하니, 그곳에 '나 자신'은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도대체 누구길래 페르소나에 가려 그토록 쪼그라드는 걸까?

역설적이지만 내 페르소나를 뜯어보면 그것으로부터 나를 찾아갈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나'라는 '원형'에 덕지덕지 붙은 '페르소나'의 총합이 바로 진정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페르소나에 짓눌려 그 여정을 감히 엄두 내지 못한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따윈 없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어서 빨리 각각의 역할을 동시다발적으로 해내라고 다그치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 자신을 뒤에 놓고서라도 정신없이 뛰는 이유다.


글쓰기라는 욕구가 갑자기 마음에서 튀어나왔을 때.

그러니까 그것은 나를 돌아보라는 강렬하고 통렬한 신호다.


잠시 멈추어야 한다.

나를 돌아봐야 한다.

가면 하나하나를 고찰하여 세분화해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해 써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살아낼 수 있다.


자칫, 책을 써야 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책'이 아닌 '글'을 써야 한다. 책은 글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므로, 과정 없이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목적 없는 뜀박질은 멈춰야 한다. 이미 우리는 목적 없이 숨이 가쁘도록 충분히 뛰며 살아왔다. 이제는 숨을 좀 골라도 된다.


글쓰기는 숨을 고르는데 단연코 최고의 수단이다.

그 수단이 주는 선물과 가치는 실로 엄청나다.


외면과 내면을 동시에 바꿀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면을 바꿈으로써 묵직하고 흔들리지 않는 외면까지 완성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에 회의가 들거나, 무언가 너무 소모적인 삶이 거듭된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봤으면 한다.


강렬하고 통렬한 그 신호를 미리 알아차리면 좋겠다.

하루라도 더 빨리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나의 고뇌는 조금 덜 했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러나 그 고뇌는 또한 글의 소재가 되므로 나는 지금의 나를 다그치지 않기로 한다.


평생을 자책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온 나를, 스스로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그 강렬하고 통렬한 신호를 알아차린 덕분이다.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

글을 쓰는 나를 사랑하는 이유.


강렬하고 통렬한 그 신호는 다름 아닌 '나'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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