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잘한다는 것과 못한다는 것의 경계
나는 일을 잘한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성과라는 것은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잘했다고 하지만 성과가 나쁠 수도 있고, 반대로 대충 했는데도 성과가 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의 관점으론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실력은 별로 없지만 이미지가 좋아 많은 사람에게 일 잘한다는 평판을 듣는 사람도 분명 있다.
직장이란 곳엔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 잘한다는 것과 못한다는 것의 경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단언할 수 없다. 또 하나의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개개인인의 슬럼프다. 슬럼프에 빠지면 누구도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일 잘하던 사람은 성과가 줄어들고, 일 못하는 사람은 더 못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일 못함의 정도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앉는다.
그 누구도 항상 일을 잘할 순 없다.
일 못한다는 것의 확실한 기준
그러나 재밌는 건, 일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게 어떻게 그렇게 한결 같이 일을 못할까 싶다. 주식엔 '데드 캣 바운스'라는 용어가 있다. 하방으로 곤두박질치는 주식도 죽은 고양이가 움찔하듯이 한 번은 튀어 오를 수 있다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일을 정말 못하는 사람에겐 이러한 현상도 없다. 꾸준함에 박수를 쳐야 할지, 그 한결같은 모습에 놀라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방향으로도 대단한 건 사실이다.
직장이란 곳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오답은 있다.
마찬가지로, 일을 잘하는 것에 대한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나, 일을 못한다는 것에는 확실한 기준이 있다.
일 정말 못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그 확실한 기준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니까요, 내 일은 끝났다니까요? 나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일을 하다 보면 유관부서와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직장이란 곳은 조직과 사람 그리고 시스템이 맞물려 있음으로, 그것들이 갈등과 화합을 통해 회사 전체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일은 다른 어느 부서나 사람 그리고 시스템에 맞물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서 일이 제대로 끝나지 않으면 그 일은 진행되지 않는다.
저 위의 대사(?)를 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일을 제대로 끝냈느냐? 그것도 아니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면서 만사가 귀찮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다.
어느 다른 부서에서 연락을 했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기에 연락을 한 것이다.
더불어 그 일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서로 이것이 어떻게 넘어가 어떠한 영향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내게 될지, 일 잘하는 사람은 끝까지 관심을 갖는다.
혹시라도 위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측은하게 생각하자.
그 사람은 딱 그 정도에 머무르는 사람이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니 측은한 마음은 갖되 간섭하진 않아도 된다.
1. 일 잘하면서 커뮤니케이션도 잘하는 사람.
2. 일은 못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 좋은 사람.
3. 일은 잘하는데 커뮤니케이션은 좋지 않은 사람.
4. 일도 못하고 커뮤니케이션도 못하는 사람.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지 묻고 싶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모두는 1~4번에 모두 속해 있다. 판단은 나도 하지만 너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악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점검하고 실력을 향상하려 노력해야 한다.
최악은 누구인가?
누가 봐도 4번이다. 1~3번은 그나마 뭐라도 하나는 잘하는 사람이다. 일도 못하는데 커뮤니케이션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정말 있다. 사실,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일을 못할 가능성도 높다. '커뮤니케이션'은 고도의 기술이다. 직장 생활 매 순간순간 쓰이고 있으며, 되지 않을 일도 커뮤니케이션으로 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이성'과 '감성'을 모두 내포한다.
내가 하는 일을 잘 알아야(이성) 커뮤니케이션이 확실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며(감성) 소통해야 커뮤니케이션이 발전적으로 활성화된다.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다면 '이성'과 '감성' 둘 중 하나가 부족하거나, 아예 둘 다가 엉망이라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이메일을 받거나 통화를 할 때. 자신의 업무나 요점을 잘 모르는 경우. 또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채 기분 나쁜 말을 늘어놓는 경우가 그렇다. 지식도 없고 배려도 없는 커뮤니케이션. 생각보다 이러한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더불어, 일 못하는 사람은 '커뮤니케이션'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내세우거나, 기분에 따라 업무를 처리한다. 그것이 일이자 자신의 업무 역량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을 아무렇게나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업무 속도를 중시 여긴다.
속도를 내어 처리하고 실수나 부족함이 있으면 보완하는 업무를 지향한다. 가장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 주관적인 견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침착하게 짚고 넘어가는 업무 스타일도 때론 앙망한다. 그러나 성격상 나는 전자를 더 추구한다.
문제는 시간이 더 걸리고, 덜 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을 정말 못하는 사람들은 '피드백'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피드백을 빨리 해야 하는지, 피드백을 자세히 해야 하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잊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저들이 급하면 알아서 또 보내겠지라는 마음이 있는 건지. 때론 메일을 미확인 삭제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깡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파악하고 "저 사람한테 보내면 답장 절대 안와"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수 십통의 메일을 보내고, 전화로 닦달을 해야 회신이 올까 말까다.
그 확실한 기준은
'일이 되느냐 아니냐'다!
정리를 해보면, 일을 정말 못하는 사람의 기준은 명확하다.
바로 '일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다. 직장은 결국 일로 만난 사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유하고 부드럽게, '형' 그리고 '누나'하면서 즐겁게 소통하자는 게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이든 각각의 업무 역량이든. 이 모든 건 일을 하기 위한 과정이다. 즉, 일이 되어야 한다. 사람보다 일이 우선인 곳이 직장이다.
그러니,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을 못한다는 것의 절대 기준이 된다.
물론, 일을 '못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은 구분해야 한다. 잘하려고 하는데 성과가 잘 안 나오는 사람보다, 일 자체를 그저 하기 싫은 사람이 더 심각한 대상이다. 사실, '일 정말 못하는 사람' 중에는 '일 못하는 사람' 보다는 '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겐 어떤 묘약도 없다.
일을 정말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화 '식스센스'가 생각난다.
주인공 남자아이가 부르스 윌리스에게, "유령들은 저들이 죽었다는 걸 몰라요"라고 말한다. 유령이었던 브루스 윌리스는 그 말을 그저 흘려듣는다.
이처럼, 일 정말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일을 못하는 사람인지를 잘 모른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오늘도 무탈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한다.
혹여라도, 내가 일 못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나로 인해 업무가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틀에 갇혀 큰 그림을 보지 못하거나, 혹여 내 커뮤니케이션으로 누군가 상처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마지막으로 피드백을 늦게 주거나 안 주고 있지는 않은지.
사실, 위에 열거한 일 정말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나의 지난날과 지금의 나를 돌아보기 위한 글이기도 하다.
주위에 있는 답답한 사람들의 모습이 부족했던 내 모습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그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과, 혹시라도 저지를지 모를 그 실수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쪼록, 항상 일을 잘할 순 없어도 일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장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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