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누구와 함께 있지 않다는 일차원적 외로움과는 무관하다. 또는 누군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 유아적 감정도 아니다. 그저 외로운 것이다. 존재가 느끼는 외로움. 존재가 느껴야 하는 고독함.
나는 이제 이 외로움이 싫지 않다.
혈기 왕성할 때의 외로움은 사람을 미치게 하지만 지금의 외로움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차분한 기분에 젖어들다 보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을 돌아보게 된다. 돌아본 내 삶은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다. 어쩌면 그 어중간함을 지향하느라 삶은 그렇게 흔들렸나 보다라며 헛웃음을 짓는다.
그러다 마음의 헛헛함은 위장의 허전함으로 찾아온다.
참 재밌다. 결국 사람은 먹고사는 존재이던가. 아무리 슬픈 일을 맞이해도 목구멍으로 무언가를 넘겨야 다음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어쩌면 그것은 삶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살아갈 거면서.
어차피 살아낼 거면서.
마치 영원히 안 먹을 것처럼, 마치 평생 화장실에 가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고상한 척, 외롭고 괴로운 척 알 수 없는 대상에 온갖 투정을 부린다.
라면 하나를 끓인다.
군대와 같이 찾아온 외로움은 라면의 온전함에 퇴각한다.
온갖 합성 조미료가 가득한 음식이지만, 그 따뜻함과 충만함은 이상하리만큼 몸은 물론 마음까지 돌보는 재주가 있다.
누군가 라면은 몸에 나쁜 것이라 치부한다면, 한 번이라도 라면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본 적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여행의 시작이 여행을 떠올리고 계획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라면을 끓이기로 마음먹고 물을 올리는 그때부터 외로움은 가시기 시작한다. 통통한 면발이 위장을 채워준다면, 따뜻하고 칼칼한 국물은 마음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