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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Oct 26. 2021

흰머리를 받아들이는 마음

편안해지는 건 다름 아닌 내 마음이다.

"아니, 흰머리가 왜 이렇게 많아졌어요?"

나는 정말 괜찮은데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난 마음이 요동했다.

흰머리라니. 몇 개 보이기는 했었는데 사람들이 인사로 건넬 만큼 내 흰머리가 많아진 건가?


거울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밖에 나가서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나는 뭐 하고 사느라 흰머리 늘어나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까?

흰머리들은 분주하게 자라나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 흰머리보다도 분주하지 못했단 생각에 괜한 열등감과 질투심이 몰려들었다. 아니, 나름 바쁘고 쉴 새 없이 살아왔는데 무얼 위해 그랬는지 모른다는 허탈감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다.


어렸을 때 어머니 흰머리를 뽑아주던 생각이 난다.

어린 내게 있어 어머니의 흰머리 하나는 다름 아닌 100원이었다. 족집게를 들고 서투르게 뽑다 보면, 흰머리가 아닌 검은 머리카락을 뽑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나에게 100원을 빼앗진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어릴 때였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흰머리가 내 것보다 더 빨랐단 이야기다. 고사리 같은 손이 뭐를 해도 어설펐을 텐데, 어머니는 삶의 고단함을 잠시 어린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풀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흰머리는 더 많아졌고 오히려 검은 머리카락을 찾는 게 더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흰머리 몇 개를 우리 아이들에게 뽑아달라고 할 수준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흰머리 하나에 100원이라는 돈벌이의 기회를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나는 가끔 아이들의 다리나 배에 머리를 대고 어릴 적 어머니가 느꼈을 그것을 흉내 내어 보곤 한다. 정확하게 같은 걸 느끼셨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렴풋하게나마 삶의 고단함과 무게를 어떻게 덜어 내셨는지 짐작을 해볼 뿐이다.


흰머리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염색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놔둔다. 나는 후자 쪽이다. 염색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백색으로 변해가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여야겠단 생각이다.


불혹이라는 나이를 전후해서는 젊어 보이려 안간힘을 썼었는데, 시간이 좀 더 지나니 이제는 그저 나이와 흰머리를 받아들이는 게 좋다.

걸맞지 않게 젊어 보이고, 걸맞지 않게 세련돼보이려 했던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면 우습기 그지없다. 자기만족이란 것에 잠시 취했으나, 취기가 사라지면 모든 게 후회되고 부끄럽다.


그러니까 흰머리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첫째, 흰머리가 생기는지도 모르고 뭘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것.

둘째, 흰머리가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내 모습이 아닌 척, 젊어 보이는 척하지 말 것.

셋째, 그저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고유의 내 것으로 만들 것.


나는 간혹 흰머리가 훈장과도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적인 노화의 과정일 수도 있겠으나, 어쩐지 급격하게 늘어난 흰머리는 몸과 마음이 고생했기 때문이라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 고생은 아마도 미우나 고우나 나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와 관련되지 않은 고생은 없으니까.


이젠 흰머리의 개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인사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저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보자고 마음먹을 뿐.

편안해지는 건 다름 아닌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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