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여러 군데에서 회자되고 일명 '짤'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김연아 선수의 대답이 많은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과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대답이 영 심오하지가 않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스트레칭) 하세요?"란 물음에, 김연아 선수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란 답을 한 것이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에게 던진 질문엔 아마도 많은 기대가 실려 있었을 것이다.
조국의 부름을 받아, 세계 최고가 되려고, 스스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마도 그러한 말이 섞인 대답을 기대했겠지만 김연아 선수의 대답은 그저 귀여운 동네 후배가 던진 푸념과도 같았다.
더불어, 그 대답에서는 그 어떤 '열정'을 느낄 수 없었다.
굳이 그것에 온도계를 들이밀어 보자면 우리가 기대하는 '뜨거움'은 있을 리 없고, 체온보다 낮은 온도가 측정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김연아 선수의 이 대답에서 큰 내공과 심오함 그리고 그 어떤 뜨거움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온도를 느꼈다.
해내는 힘은 열정이 사라진 뒤 발휘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MBC 스포츠 탐험대 유튜브 화면 갈무리
열정으로 시작하고, 열정으로 주저앉는다.
'열정'은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 사람의 체온이 1도 오르면 면역력이 5배 높아진다는 이론도 있다. 준비 운동을 하는 이유도 체온을 높이기 위함이고,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땐 혈압이 증가하며 몸의 온도를 순식간에 올리기도 한다. 특히, 마음에서 무언가 '뜨거움'을 느끼게 되면 심장은 쿵쾅대고 나도 몰랐던 힘이 생기기도 한다. 이처럼, '열정'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온도'이자 '에너지'다.
그래서 우리는 설레는 가슴과 쿵쾅대는 마음으로 많은 일들을 벌인다.
동기부여 영상을 보았거나, 무기력한 삶에 종지부를 찍자며 자기 계발을 시작하거나, 누군가 우리에게 던진 '너 요즘 살찐 것 같다'는 말에 당장 나가 달리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열정'이란 '온도'는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사랑'도 '열정'을 닮았다. 뜨거운 온도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국경과 인종을 넘어서까지 시작되지만,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설렘과 뜨거움이 가시고 난 뒤에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엔 유효기간이 있다'란 말이 있는 이유다.
열정 또한 마찬가지.
열정은 식게 마련이고, 그렇다면 열정이 식은 뒤에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뜨거운 온도는 상온에서 식어 버린다. '뜨거운 온도'가 우리 '열정'이라면, '상온'은 우리네 '현실'이다. 현실은 우리의 쿵쾅대는 가슴이 계속해서 뛰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온갖 현실적인 이유로, 우리의 온도는 서서히 내려가고 두근대던 심장 또한 그 박동을 가라 앉힌다.
그렇게 열정이 식어 버리면, 우리는 그와 함께 주저앉는다.
아마도 이런 삶의 순간을 반복해서 겪었을 것이다. 온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스스로를 끈기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는 그 반복에 격하게 몸서리치고, 또 격하게 공감한다.
해내는 힘은 열정이 사라진 뒤 발휘된다.
마이클 조던이 남긴 말이 있다.
그냥 해라. 재미를 느껴라. 과정을 즐겨라.
무미건조한 말 같지만, 나는 이것이 앞서 김연아 선수가 내뿜은 뜨거운 온도를 아우르는 또 다른 온도라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말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하고 싶다.
재미를 느껴라. (느끼지 못한다면.) 과정을 즐겨라.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냥 해라!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큰 막막함을 느꼈었다.
배워 본 적도, 끈기 있게 무언가를 써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따라 글을 써 내려갔다. 그저 내 이야기를 썼을 뿐인데, 조회수가 올라가고 구독자가 생겼다. 열정이라는 기차에 더 많은 석탄을 넣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석탄은 바닥나고, 온도는 내려갔다. 열정이라는 기차는 멈췄다. '내가 그렇지 뭐'라는 자책과 함께 그대로 주저앉았던 기억이 난다.
다시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을 때, 나에겐 뜨거움이란 게 없었다.
그저 그렇게 주저앉는 게 싫었다. 그래서 목표를 두지 않았다. 얼마 만에 글 한 편을 쓰던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뜨거움이라는 온도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썼다. 누가 읽든 안 읽든. 하나하나 쌓아가면 무어라도 되겠지란 생각과 함께. 설령, 쌓아 놓은 그것이 쓰레기가 될지언정 우선 쌓고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놓은 글들은 어느새 9권이라는 책이 되어 나왔다.
브런치 구독자 수도 1만 명을 넘었다. 직장인이라는 두껍고 무거운 페르소나가 있지만,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오고 프로젝트 협업 제의도 많이 들어온다.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설레는 단어에 기대어, 열정의 힘으로 도전했다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그저 '글'을 썼을 뿐이다. 내 생각과 마음을 적었고 나눴다. 설레는 마음으로, 무엇을 이루어야지...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는 걸 돌이켜 볼 때. 김연아 선수와 마이클 조던이 이야기한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해내는 힘은 열정이 사라진 뒤 발휘된다'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유다.
'해내는 힘'은 멈추지 않는 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고 해서 쉬지 않는 게 아니다. 강박에 싸여 무언가를 매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어 의미를 찾고 하나하나 쌓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 뜨겁지 않고, 설레지 않고, 가슴이 쿵쾅대지 않아도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해내는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뜨거움에 들떠 누구라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해내는 힘은 그 온도에 기인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아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을 잘 관찰해보는 것도 좋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보다 더 많은 '해야 하는 일'을 했을 게 분명하다. 뜨거움 뒤에 감춰진, 냉랭하고 차가운 과정이 분명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 둘의 온도를 모두 볼 줄 알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결국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