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축복과도 같다.
그런 날이 있다.
바쁜 것들이 가시고 난 뒤 무력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날. 정신없을 땐 다음 생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돌멩이로 태어나고 싶다가도, 막상 아무 할 일이 없으면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 불안감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만큼, 그 이상으로 나는 뒤처진다는 생각.
정해 놓은 목표에 다가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 기준 속에서 바쁠 일이 없지만 마음은 왠지 분주하다.
그 불안과 분주함을 나는 이제 피하지 않는다.
대신, 가만히 앉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적는다. 정말로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는 날. 그렇다면 소란하고 분주한 마음을 모두어 글을 쓰기로 한다.
해야 할 일이 글쓰기밖에 없는 날이라니.
갑자기 행복한 감정이 넘쳐난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삶 속에서 나는 괴롭다.
그러나 그 괴로움 속에서 글감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기어 나온 생각과 감정을 황급히 피하던 시절, 그러니까 글쓰기를 하기 전의 그 시간들은 방황 그 자체였다. 해야 할 것이 당장 없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내 정서는 이랬다가 저랬다가를 반복했다. 목적 없는 흔들림, 가치를 모르겠는 한숨, 왜 살고 있는지를 모르겠는 막막함.
이러한 마당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아주 간혹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글쓰기만으로도 하루가 족할 그날은 내게 있어 축복이다.
평생 아무 걱정 없이 글쓰기만 하고 싶다는 생각은 내려놓은 지 오래다.
걱정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있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모두 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길 좋아하고, 오가는 와중에 몰랐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즐기면서 어려워하고, 쉽지 않으면서도 통쾌한 그 과정을 나는 사랑한다.
글쓰기 자체는 나에게 축복이며, 내가 나에게 주는 참된 선물과도 같다.
혹시라도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그날 하루는 글쓰기를 해보는 것을 종용한다. 물론, 할 일이 많고 아무리 바빠도 글쓰기는 이어가는 게 좋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바쁠수록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 멈춤의 순간에 글쓰기는 또 다른 방향을 나에게 제시해주고, 숨을 고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무기력감이 덩그러니 놓인 그날.
나는 무조건 쓰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