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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17. 2021

[서문] 어제의 내가 어때서

'후회'는 그렇게. 언제나 나에겐 또 다른 '시작'이었다.

'나는 그때 왜 그리 바보 같았을까?'
'그때 그러지 말 걸, 아니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해서 오늘의 나는 이 모양인 걸까?'


과거의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나를 괴롭힌다.

지난날의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후회'다. 이 단어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는 단연코 없을 것이라 말한다. 후회란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경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후회'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다. '낭비한 시간에 대한 후회는 더 큰 시간 낭비', '가장 쓸데없는 것이 탄식이다'라는 명언과 격언도 차고 넘친다. '후회'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패배자는 패배의 원인을 다른 것으로 돌리려는 못되고도 당연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패배감을 느끼는 내 선택은 아주 간단하다. '지난날의 나'에게 그 모든 걸 덮어 씌우는 것이다. 후회는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먼저 후회할 일은 없다. 그에 걸맞은 표현은 이미 '불안'과 '두려움'이 꿰차고 있으니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다.


평생을 지난날의 나를 원망하며 살아온 이유가 그것이다.

과거로 향하는 뾰족한 화살은 과거의 나를 겨냥한다. 


그러나.

활시위를 당겨 놓은 화살이 '지난날의 나'에게로 가 명중할 때, 피를 흘리는 건 바로 '오늘의 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일까? 

그리고 왜 일까?

왜 때문일까?


'나'는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을 수렴하는 존재라서다. 수렴의 중심엔 '오늘의 나'가 있다. '과거의 나'로부터는 후회를, '미래의 나'에게는 불안을 안고 있는 자아. 언제 어디서든 '낀 존재'는 고단하다. 후회와 불안을 홀로 안고 살아야 하는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 혼란한 상황에서 나를 위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잘 살아내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내가 떠올린 답은 바로 '자기 화해'다.

자기 화해는 자존감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자기 화해를 통한 자존감이 기반이 되어야 오늘은 물론 내일의 나도 견고해질 수 있다. 


'후회'라는 말은 과거의 나에게 두드러기 반응을 보여왔다.

미안했다. 과거의 나에게. 오늘의 나에게. 미래의 나에게까지.


나는 왜 그토록 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못난이 취급을 했을까?

후회라는 말이, '나'와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음을 왜 진작 몰랐을까? 더불어, 후회라는 에너지를 어둡게 소모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빛의 에너지로 삼으면 안 되는 걸까?


이것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버린 나는 또다시 후회한다.

그러나 이번엔 과거의 나에게 화살이 아닌 손을 내밀기로 한다. 화해보다는 싸웠던 적이 더 많았던 나에게. 정작 후회란 말이 발생하는 시점은 오늘임을 감안할 때, 내 미안한 마음의 정도는 더 커야 함이 옳다.


갑자기 마음 어딘가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어제의 내가 어때서!!!'


이것은 후회가 내 삶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더 현명하게 맞이할 수 있는 자아의 계단이 될 거란 확신임을 직감했다.


그러고 보니, '후회'는 그렇게.

언제나 나에겐 또 다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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