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란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실로 대단한 표현력이자 비유다. 마음이라는 추상에, 상처라는 물리적 속성을 덧입히니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가 있다.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엉엉 울면서 빨간약을 가슴에 바르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 드라마 작가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싶다. '마음의 상처'란 말을 듣고 나서, 그 명장면을 만들어냈을 테니까.
상처엔 무엇이 특효약일까.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다루고 있을까.
몸에 난 상처라면 우리는 연고를 바르거나 반창고를 붙인다.
상처 난 부위를 호, 하고 불어준 뒤 각자의 방법으로 그것을 바르거나 덮는다. 또는, 아주 작은 상처라면 그대로 두기도 한다. 영화 속 슈퍼 히어로와 같진 않지만,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생과 회복 능력이 있으니까.
예전엔 상처 그 자체에 호들갑이었다.
내가 아프고, 내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또 다른 상처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젠, 제법.
상처에 골몰하지 않고 상처가 생긴 이유를 떠올릴 줄 알게 되었다.
상처는 대개 마찰로부터 온다.
'마찰'은 혼자 일어나지 않는다. 두 개 이상의 물체 또는 두 명 이상의 입장 차이가 발생할 때 마찰이 생기고, 그것이 심하면 상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에, 마음에 그렇게 상처를 입으며 살아간다.
이미 마찰은 발생했고, 상처는 남았으며 몸과 마음이 쓰릴 때.
나는 청소를 시작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간혹 아니 자주. 그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꽤 도움이 될 때가 많으니까.
청소는 정리와 정돈 그리고 쓸고 닦는 일련의 과정이다.
나는 그렇게 내 상처를 정리하고 정돈하며 쓸고 닦는다. 때론 사람 관계를 정리하고, 어지러운 내 마음을 정돈하고.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쓸어 내고, 나도 모르게 거뭇하게 찌든 세상의 때를 닦아 낸다.
청소라는 물리적 속성이, 마음이라는 추상을 어루만진다.
사람은 움직이고 땀 흘리며, 무언가에 골몰할 때 치유된다. 청소는 그 모두를 내포한다. 주변이 정돈되고 반짝반짝 윤이나면, 나는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와 다짐을 얻게 되는데, 아무래도 이것이 청소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청소 이후에, 다시 지저분해지고 때가 묻을 걸 나는 잘 안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또다시 청소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청소는 내게 있어 상처에 바르는 연고나, 그것을 덮어주는 소중한 반창고다.
상처도 아물고, 주변도 깨끗해지는 그 과정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불어, 정돈된 그 환경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써내는 글도 내게 있어 짜릿함이다.
예를 들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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