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의 세 주인공은 서로의 것을 탐한다.
제자 서지우는 그의 스승인 이적요의 천재적인 재능을, 싱그러운 관능의 열일곱 소녀 은교는 위대한 시인의 세계를, 명성을 얻은 이적요는 그가 가지지 못한 젊음을.
그 세 사람의 질투와 시기 그리고 탐욕이 129분의 러닝타임을 이끈다.
예상했듯이, 결과는 개운치 않다.
누구 하나 웃으며 영화는 끝을 맺지 않는다. 사랑이었는지 탐욕이었는지. 젊음과 늙음이 상인지 저주인지. 그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어느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또 어느 누군가는 이별을 맞이 한다.
자기 것이 아닌 걸 바랄 때, 삶은 고단해진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다.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힘겨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김없이 내 것이 아닌 것에 집착했던 기억이 그득하다. 문제는, 그것이 내 것인지 아닌지를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욕심과 탐욕이 눈앞을 가리면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 우리네 속성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더 어려운 건.
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내 맘대로 어떻게 하려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변수와 왜곡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생각은 오만함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고 오염된 의도와 생각들은 어떤 형태로든 파국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무언가를, 누군가의 마음을 분명 가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 '소유'의 개념을 재정의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서 시기와 질투 그리고 탐욕을 덜어낸다면. 그리고 그 대상을 내 맘대로 어찌하려는 마음을 멀리 한다면. 나는 분명 무언가와 누군가를 바라고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엔, 내 것이다가 내 것이 아니게 된 것을 보내주는 것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젊음이 그렇고, 마음이 변해 떠나가는 연인이나 정이 들었지만 오래되어 못 쓰게 된 물건도 그렇다. 보내야 할 것은 보내야 하고, 놓아주어야 할 것은 놓아주어야 한다. 내 손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을 위해 허공을 허우적 대지도 말고.
그 누구도 각자의 삶이 추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스스로의 삶이 허름해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보면 된다.
혹시라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손에 넣으려 아등바등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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