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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5. 2016

[쪽 소설] 파리에서

누군가에게 보다는 조금 더 나에겐 무거웠던 의미

프랑스 파리.

어쩌면 흔하디 흔한 단어가 되었는지 모른다.


모두들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곳이라서.

또는 이미 많이 가본 곳이라서.


파리라는 이름은 상징적이다.

그 나라 이름을 앞설 정도로.


'미국 뉴욕'과 '체코 프라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에게는 좀 다른,
프랑스 파리라는 공식"


프랑스 하면 파리. 파리하면 에펠탑. 에펠탑 하면 낭만이라는 생각의 흐름은 이미 공식이 되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공식을 풀기 위해 프랑스 파리를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공식'이 좀 달랐다.

그 무엇보다 무거웠고 먹먹했다. 처음 도착하여 느낀 감정들.


이제는 출장이든 여행이든 자주 오고 가는 곳이 되어 친숙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지만, 어째 오늘 출장길에는 그 먹먹했던 옛 기억이 새록했다.


그 기억이 그저 스쳐 지나가면 되었을 것을, 이내 감정에 호소하고 감정은 작용하여 지난날을 되돌아보기 위해 나를 모니터 앞에 앉혀 자판 위에 손을 얹게 했다.


"조금은, 아니 멀리 돌아간
프랑스 파리라는 곳"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터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나의 유년 시절은 다행히 그리 불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족해 보일까 봐 채워주시려는 어머니의 고생과 노력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이가 차면서 다가오는 아버지의 부재는 커져만 갔다.

남들 다 가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은 꿈이었다. 내게는.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갖가지 공모전과 인턴 생활, 그리고 학원 강사를 하며 모아둔 돈이 제법 되었더랬다.

이내 나에게 줄 선물은 유럽 배낭여행으로 정했고, 지난날의 고생이 어느 정도는 보상받는 순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담금질이 필요했던 것일까.

가족 중 한 명이 경제적인 사고를 치고 내가 모은 돈 이상의 빚을 지고는 망연자실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억울했고, 억울했고 또 억울했다.

억울하다 못해 억울해서 세상과의 이별을 실천하려 하기까지 했다.


그것을 이겨 낸 일련의 과정들은 몇 페이지로 풀어낼 수 없는 내용이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여유를 부리며 그때를 회상할 정도로 많이 회복했고 나아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5년이 지난 후, 난 프랑스에 갈 일이 생겼었다.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게 되는.

엄밀히 말해선 프랑스가 아니었다. 모로코로의 출장길이었다.


그 사이 트랜짓 시간이 4시간 30분이었다. 내게는 그 시간이 영원과 같았다. 무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시간 안에 지난 힘들었던 모든 것을 보상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무척이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좀 무거웠던,
먹먹했던 에펠탑과의 조우"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 발을 디딘 나는 아직도 내가 '유럽'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실감이 안 났다.

어서 증명해야만 했다. 내가 유럽에 있다는 것을.


유럽에서 가장 큰 땅 덩이. 프랑스면 그것을 증명하기에 딱 좋았다.

그리고 에펠탑은, 내게는 프랑스의 상징이 아니라 유럽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리고 증거였다. 그리고 난 그것을 조우하여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하자고 규정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이 달려가는 모습이 이와 같다고 할까.

정신없이 헤매다 에어프랑스 셔틀버스를 타고 오아시스가 있는 시내로 향했다.


개선문 앞에 내린 나는 개선문의 위용을 느낄 새도 없이,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면서 그곳이 샹젤리제 인지도 모를 정도로 다급하게 오아시스를 향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는 아프고 뒤쳐졌지만 머리와 가슴은 하체보다 더 앞을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우한 에펠탑.


별거 없었다.

생각보다 컸다.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를 것만 같았던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먹먹했다. 무거운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산 정상에서 느끼는 상쾌함과 숨이 차오른 구역질이 동시에 몰려왔다.


삶이 힘들어 세상을 등졌으면 보지 못했을 무엇이라는 생각에, 막상 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몸에 힘이 풀렸다. 갈증으로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이 오아시스의 물을 마음껏 먹고 내뱉는 배부른 소리였는지도.


그렇게 30분간을 센강과 에펠탑을 이어주는 다리 한쪽 구석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것이 내가 프랑스 파리에서 에펠탑을 처음 조우했던 공식이자 기억이었다.


"삶 속에서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들"


처음 에펠탑을 조우한 지도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주재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마음먹으면 차 타고 몇 시간만 달려 유럽 여러 국가의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 위치다.

지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 유럽에 살려고 배낭여행 한 번 참은 거다...라고 말한다.


맞는 이야기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하지만 과정으로 보면, 시간이 흘러 저 세상에서 절대자를 만나게 되면 꼭 따져봐야 할 몇 가지 일들 중 하나다.


지금 유럽에 살게 되었더라도, 그때의 유럽 배낭여행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더 소중했을지 모른다.

더불어, 애초부터 왜 아버지는 일찍 데려가셔서 그러한 고생을 하게 했는지, 없는 살림에 왜 경제적인 사고는 터지게 만들어 사람 죽을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는지, 여하튼 따져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물론, 감사한 것도 많다.


다른 공식으로 처음 유럽 땅을 밟은 그 날을 특별한 기억으로 새겨주었다는 것.

문득, 자만심이 들 때면 과거의 그때를 돌아보며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나서 후배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이 있다는 것.

세상을, 조금은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겼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가 컸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누구보다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삶을 등지려 했었기에,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 것.

그래도 그 어려움을 이겨낸 나 자신의 모습을, 에펠탑 앞에서 조우하게 해 준 것.


결국 내가 조우한 건 에펠탑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것도.




우리는 분명 삶 속에서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들이 있을 거다.

그것이 사람이든, 장소든, 물건이든, 상황이든 그 무엇이든.

어쩌면 지나고 보아 특별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 당시엔 죽도록 힘들지 몰라도.


'특별하다'라고 머리와 가슴에 입력이 되는 그 순간.

그것은 언젠가 우리 마음속에 '별'과 같이 빛날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매우 특'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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