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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8. 2016

[너를 만난 그곳]#22. 같이 걸을까, 그아이의 시선

새로운 누군가와 같이 걷는다는 게 그 주위를 새롭게 만드는 것 같았어

- 1 -


아저씨.

난 생생하게 기억해.


그 날 있잖아. 내가 더치 남자친구와 헤어진 그 날.

내가 차지게 욕을 내뱉었고, 그 한국 욕을 듣고는 누군가 돌아봤고. 그 욕을 알아들은 사람은 한국사람일 거였고, 그게 아저씨였잖아.


나야 뭐.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돈으로 그저 하루하루 즐기며 사는 게 전부라, 남자친구는 그저 하나의 액세서리였거든. 더치 남자애들은 매너가 참 좋아. 나를 귀찮게 하지도 않고, 한국 남자들처럼 심하게 간섭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아. 뜨겁진 않지만... 뭐랄까. 편한 느낌?


- 2 -


오랜만에 한국 사람이랑 대화했던 게 좋았던 것 같아.

그때는 바로 이별 뒤였고, 아무리 그래도 이별 그 자체가 유쾌한 건 아니니까.


아저씨랑 이야기한 것.

그리고 아저씨가 시켜 준 민트 티가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었어.


솔직히 정신 차려보니까 어느새 아저씨 앞이더라.

생각 없이 내뱉다 갑자기 아저씨가 말 걸어서 깜짝 놀랐었네.

그 앞에 먼저, 갑자기 앉은 건 나였지만.


- 3 -


내가 아저씨 여행에 동참하고 싶겠다고 한 건... 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어.


일단, 아저씨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동안이라 같이 다니는데 창피하지 않을 정도라는 거?

농담 반, 진담 반이고.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어. 따뜻한 사람이고. 물론,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바로 느꼈거든.

들어보니 계획도 하나도 없이 온 것 같고.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사실 나도 네덜란드를 여행해 본 적이 거의 없어.

프랑스나 이태리, 스페인만 돌아다녔거든.


이 참에 나도 네덜란드 좀 구석구석 다녀보려고. 물론, 도움이 되려고 노력은 할 거야.

민트 티 값은 해야지. 그 날 이야기 들어준 것도 그렇고.


- 4 -


오랜만에 눈에 불을 키고 공부 아닌 공부를 한 것 같아.

아저씨를 어디로 안내할까...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고르고 있었어.


네덜란드도 갈 데가 많더라. 생각보다.

여기 몇 년 살면서 신경을 하나도 안 쓴 거지. 내가 왜 그랬을까?


아 맞다. 고마워.

나이 차이가 엄청나던데, 나에게 말 놓으라고 해 준거.


얼굴을 보면 괜찮은데, 나이를 생각하니 내가 도저히 '오빠'라고 부를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아저씨'라고 부르고 말만 놓기로 했어. 잘했지? 나같이 예쁘고 젊은 아이랑 다닐 거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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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은 나도 그냥 가던 길만 가서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던 곳이긴 해.

그런데, 아차. 그래 내가 키가 좀 작아. 근데 알잖아. 여기 사람들 키 되게 큰 거.


작아도 너무 작은 내 키가 싫어서, 난 꿋꿋하게 10cm 힐을 신고 다녀.

발 아프고 길바닥이 돌이라서 불편한 건 생각 안 해. 내 만족이니까.


그런데, 그걸 보고도 담광장까지 걸어가자니.

내가 이래서 '아저씨'를 '오빠'로 못 부르겠어. 으이구.


맞아. 난 좀 이기적이야.

남자가 나를 귀찮게 하는 건 싫어해도, 이런 건 좀 알아줬으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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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티 내고 싶지 않았어.

아저씨 여행에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거든.


걷다가 발이 좀 아파서 뒤쳐졌는데, 발 아픈 것보다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거야.

이러다 버림받진 않을까?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 여름에 할 것도 없는데, 그렇게 되면 왠지 우울할 것 같기도 하고...


다음번엔 운동화를 신어야 하나... 그래 내가 아저씨한테 잘 보일 일도 없고.

이런 다짐까지 하기까지 했었어. 내 원칙(?)을 깨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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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사라진 아저씨는 어느새 내 앞에 분홍색 플랫슈즈를 들고 왔더라.

발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는지... 좀 신기하고 고맙긴 하대.


왜 아저씨가 그랬잖아. "자, 같이 걸을까?".

그 말이 좋았어. 같이 걷는다는 말.


연인 사이의 간드러진 말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누군가와 같이 걷는다는 게 그 주위를 새롭게 만드는 것 같았어.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던 것 같아.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나 봐.

아저씨 참 좋은 사람 같아.


- 8 -


꽃시장에서 아저씬 뭔가 생각이 되게 많아 보이더라.

관광하러 온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를 정도로.


요전에 혼자 시간을 좀 보내고 온다 하고 돌아왔을 때. 그때도 표정이 그리 밝진 않았어. 그렇다고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여행하는 사람의 그것은 아니었거든.


아저씨란 사람이 좀 궁금하더라.

저 머릿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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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꽃시장 끝에 문트탑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나오더라.

그때 아저씨가 나한테 뭘 설명하려다 말았던 것 같은데, 그냥 그 마음이 전해졌던 것 같아.


그래서 그냥 나도 아저씨를 따라서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귀를 열고, 또 마음을 열어 그 소리를 들었어. 수 십 번을 지나갔어도 듣지 못했던 그 소리를 이제야 듣게 되네.


참 새롭더라.


- 10 -


그런데, 아저씨.

나 먹는 거 보고 되게 놀라더라.


맞아. 나 완전 잘 먹어.

아저씨가 나는 외로움을 먹는 걸로 승화시키는 것 같다고 했지?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어쩜 그게 그렇게 딱 들어맞을까?

응 그게 맞는 것 같아. 나 어렸을 적부터 무지 외로웠거든.


그래서 좀 금사빠이기도 해.

배고픈 것과 외로운 것 중에 뭐가 더 힘드나면. 그냥 둘 다 힘들어. 어느 한 가지라도 못 느꼈으면 좋겠어. 그냥.


- 11 -


아저씨 닭요리까지 양보해가면서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더라.

배고픔도 외로움도 많이 달랬던 시간이었어.


나름 진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내가 영어가 짧아서 그런가, 더치 남자 친구하고는 뭔가 되게 많이 이야기하는데 사실 이런 맘 깊은 곳의 이야기는 하기가 어렵거든. 혹시라도 말은 되더라도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그게, 뭐 더 편할 수도 있지.

사람 마음, 감정 다 전해져서 뭐해.


서로 아프기만 할 것을.


- 12 -


내가 라이브쇼 보러 가자고 했을 때 놀라는 모습이 좀 귀엽더라? 아저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좀 궁금했어.


내 친구들 중에는 나 빼고 거의 다 다녀온 것 같더라고.

내가 아저씨 무대에 올려 보냈을 때 내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알아?


요 근래, 그렇게 즐겁고 크게 웃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표정 무겁게 보이던 아저씨가 무대에서 강남스타일 춤도 추고, 섹시 댄스도 추는 걸 보니 이제야 관광객 티가 좀 나더라고. 그래, 그래도 여행 왔는데 그렇게 즐길 줄도 알아야지.


내가 좀 발랄해.

그치?


- 13 -


물론, 나도 아저씨에게 당했지... 나 같은 순수한 소녀를 우락부락한 흑인 아저씨 옷 벗기는 쇼에 올려 보내 다니.

올라가는 동안은 그냥 재미있게 즐기고 오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올라가니 어찌나 떨리던지.

또 내가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게 되니 많이 부담스러웠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무대에서 내려와서 아저씨 옆에 앉으니까, 괜스레 눈물이 나더라.


나도 몰랐어.

나도 내가 발랄해서, 무서울게 없어서, 내가 생각해도 난 싹수가 없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


근데 왜 눈물이 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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