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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29. 2016

[너를 만난 그곳] #21. 같이 걸을까 Part.5

그 아이의 발랄함에 당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 39 -


갑작스레 끌려  들어온 입구에서 잠시 대기 중.

플랫슈즈에 키 작은 이 아이를 잠시 물끄러미 내려본다.


처음 타는 놀이기구 앞에 들뜬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그러고 보니 귀엽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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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의 발랄함은 나와 대조적이다.

어린 시절의 차이겠지.


그 발랄함은 여유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그리고 여유 없던 나의 어린 시절로 하여금 질투를 하게 만든다.


나도 어쩌면 발랄할 수 있었을지 몰라.

너와 같았었으면...이라는 변명을 한다면.


- 41 -


사람을 단순하게 평가하거나 판단하고 싶진 않다.

다만, 어렸을 적 부유하게 자라고 여기 이 곳에서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즐기는 이 아이의 발랄함은 가벼운 것인지 무거운 것인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첫인상의 그것은 물론 가벼운 것이었다.


다만, 그 발랄함이 밉진 않았다.

아직까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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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앞자리가 비어 있었다.

무대에는 이제 막 속옷을 벗는 스트립 걸의 쇼가 이어지고 있었다.


관객은 다양했다.

네덜란드 사람들보다는 관광객이 주류였다.

남자뿐만 아니라 남녀 커플, 그리고 대학생 정도의 어린 소녀들도 그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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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무대는 다양하게 꾸며졌다.

한 여성 스트리퍼의 댄스와 자위 쇼, 커플의 실제 섹스, 관객을 불러 올려 장난(?)을 치는 관객 참여형 쇼까지.

이러한 것들이 바로 눈 앞 작은 무대에서 무한  반복되었다.


퇴폐적이라기보다는 뭔가 유쾌한 것들의 조합이었다.

물론, 들어가기 전에 내가 이렇게 표현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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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참여를 위한 무대 도중, 갑자기 쇼를 하던 여성이 무대에서 내려와 남성 관객을 물색했다.

유럽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성을 선택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 여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지목당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 옆에 있던 그 아이가 내 머리 위로 나를 데려가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는 해맑게 웃는다.

그 아이의 발랄함에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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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로  (또다시) 끌려 올라간 나는 그 여성과 섹시 댄스를 춰야 했다.

그래도 한국 사람 대표(?)로 올라왔다는 사명감에 강남스타일 말춤을 추니 환호가 터졌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뿌듯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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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의 마지막은 물론 19금 이상의 것이었다.

여성이 누워 자신의 성기에 바나나를 대어 놓고,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간 세 명의 남자에게 순번을 정해줬다.

그러고는 순서대로 바나나를 먹으란다.


수줍은 첫 번째 20대 유럽 친구가 조금 베어 물고, 두 번째 덜 수줍은 유럽 친구가 좀 더 많이 베어 먹었다.

마지막이었던 내가 한 입 베어 물려고 하자, 쇼걸은 다리로 내 목을 꽉 조여 감싸 안았다.


사람들은 소리 내어 웃고 난리다.

그래 뭐 나하나 망가져서 세계인이 즐겁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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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내려온 나를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는 아이를 때릴뻔했다.

물론, 농담이다. 진심이 담긴.


근데 이상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무대에서 춤을 출 때,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때, 뭔가 모를 희열이 있었다.

나 혼자라면, 그리고 그 아이의 발랄함이 아니었다면 나는 올라갈 일이 없었을 것이고 이는 내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아이 덕분에,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없었을 뻔한 추억을 만들었다.

누나 때문에 돈을 날려 유럽여행이 무산되었던 대학생 시절의 나에 대한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마웠다 그 아이에게.

그 아이의 발랄함에 그렇게 당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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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반대로 건장한 흑인 남성이 경찰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

여성 5명을 물색했고, 발랄하진 않지만 그 아이에게 배운 발랄함으로 올려 보냈다. 그 아이를.


발랄한 그 아이도 좀 당황한 모양이다.

올라가는 모양새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눈망울 망울망울한 소와 같았다.


난, 잘하라고 파이팅을 외쳐줬다.

최근 들어 이렇게 통쾌하고 즐거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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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흑인 경찰은 5명의 여성에게 순서대로 하나씩 자신의 옷을 벗기라 했다.

모자, 점퍼, 시계, 벨트, 신발, 양말, 바지 등등.


음악은 흐르고 느끼한 웨이브와 함께 그에게 남은 건 팬티 한 장.

그리고 그 팬티를 벗겨야 하는 순서의 여성은 다름 아닌 그 아이였다.


이 무슨 재미있는 운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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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하던 아이는 팬티를 벗겼고, 벗겨짐과 동시에 그 흑인 남성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

순간, 아이의 비명이 터져나왔고 이번에도 거기에 모인 세계인들이 환호를 지르고 즐겁게 웃었다.


그래, 아주 오늘 우리가 세계인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구나.

그렇게 쇼가 끝이 났고 5명의 여성들은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퇴폐적이기보단 유쾌함이라고 표현되는 이유. 그럴만한 분위기였다.


- 51 -


무대에서 얼떨떨하게 내려온 그 아이는 몸을 좀 떠는 듯 싶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살짝 숙인 고개, 그리고 얼굴을 가린 긴 생머리 사이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많이 놀랐냐는 나의 말에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 순간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우는 아이는 아닐 것 같았는데...


갑자기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 52 -


내가 가지고 있던 몇 안 되는 정보.

겉모습과 첫 느낌으로 마음대로 해석한.


부유하게 자라 걱정 없이 살고 있는 아이.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다 헤어지고는 별 사이 아니라고 했던 아이.

발랄함에 아주 당당하게 살아갈 것 같았던 그 아이.


갑자기, 어쩌면 그 발랄함이 그저 가벼운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전에 알아챘던 그 아이의 외로움도 떠올랐다.


- 53 -


오늘 난 그 아이의 발랄함에 당해서 유쾌했는데, 그 아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미안, 너의 발랄함을 그저 가볍게만 보아서.

미안, 너란 아이를 그저 쉽게 단정 지어버려서.






Place Information


1. 암스테르담 운하길: 홍등가의 명성(?)에 가려진 아름다움이 안타까울 정도다. 걸으면 좋은 곳. 누구라도 함께. 주소 근처 조그마한 다리는 낮이나 밤이나 풍경을 눈에 담기도, 사진에 담기도 좋다. 마음에 담기도 좋고.

  - Oudezijds Voorburgwal 72, 1012 Amsterdam


2. Casa Rosso: '빨간 집'이란 뜻의 라이브쇼 극장. 한 밤에는 긴 줄이 이어진다. 머리 위에서 뭔가(?)를 분출하는 분홍색 코끼리 인형을 조심할 것.

  - Oudezijds Achterburgwal 106-108,1012 DS Amsterdam,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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