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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25. 2022

글쓰기로 누리는 '절망 보장권'

'절망'은 '카타르시스'의 주요 에너지다.

광장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고대 그리스엔 '아고라'라는 것이 있었다. '회의의 장소'다. 도시의 운동, 예술, 영혼, 정치적 삶의 중심지가 바로 '아고라'였다. 이것이 바로 광장 문화의 시초다. 그래서 언제나 광장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어 놓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목소리는 탄압으로 가득했던 독재정권 시절에도 유효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네 민주주의는 광장의 덕을 크게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서 희생을 치른 분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자유롭게 먹고살며 성장의 기회를 누리고 있으니까.


부족함이 없는 시대, 그럼에도 광장에서 부르짖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여전히 있다.

대부분은 자신의 어느 삶과 연관된 '보장권'을 외친다. 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어려움을 사람들은 외치고, 누구 한 명이라도 그것을 알고 그 마음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 때론 너무나 이기적으로 보이는 목소리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광장에 나가야 한다면 무엇을 외쳐야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내가 외쳐야 하는 것은 그 어떤 '결핍'이어야 한다. 내게 없으니 그것을 달라고 부르짖는 게 바로 보장권을 위한 목소리다.


갑자기 '절망'이란 말이 떠올랐다.

물론, 내게는 수많은 절망이 있다. 절망이 결핍이란 게 아니라, 그것을 마음껏 목 놓아 내뱉을 수 있는 분위기의 결핍을 말하는 것이다. SNS엔 절망이 없다. 언제나 나는 소고기를 먹고, 해외여행을 다녀야 한다. 무언가 남들보다 더 나은 게 아니라면, 이것을 포스팅해 되는 걸까... 란 생각마저 든다.


나는 그래서 '절망 보장권'을 부르짖고 싶다.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마음껏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구독자수나 조회수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내 SNS나 유튜브에 그 어떤 악플이 달리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간다 해도, 나는 내 절망에 대해 말하고 싶다.


다행히, 나는 글쓰기를 통해 그 보장권을 누리고 있다.

글쓰기의 처음엔, 아름답고 즐거운 것만이 글의 소재가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제법, 슬프고 아픈 것들도 잘 끄집어낸다. 오히려 그것들을 끄집어내며 얻은 마음의 치유가 내겐 더 값지다.


'절망'은 '카타르시스'의 주요 에너지다.

절망은 희망이 끊기는 데에서 온다. 그러나 희망이 끊겼다는 건, 또 다른 희망이 들어찰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우리네 마음은 절망이 한 번 휩쓸고 가야 마침내 정화된다.

컵이 컵인 이유는 안이 비었기 때문이다. 비어야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 무언가를 채울 때, 우리는 그것을 다시금 채울 수 있다. 즉, 절망이 있어야 기쁨이 있고, 기쁨은 절망의 또 다른 형태라는 걸 나는 글쓰기를 통해 깨달았다.


좋다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슬프다고 처절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절망 보장권'을 획득함으로써 그 어려운 것을 하루하루 연습해 내고 있다.


절망을 허하지 않는 시대.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시대.


그러나, 그 모두는 절망을 안고 있는 시대.

누구 한 명이라도 더, 글쓰기를 통해 그 보장권을 누리면 좋겠다.


지금의 여기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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