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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15. 2022

하늘은 스스로 쓰는 자를 돕는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일종의 기도다.

'창천불부고심인(蒼天不負苦心人)'


창천불부고심인.

'하늘은 스스로 애쓰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바꿔 말하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 즉, 스스로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하늘조차 돕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에 의문을 내비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봤을 때, 별 노력하지 않아도 잘 나가는 사람이나 가진 것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할 시간이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은 언제나 쉬워 보이기 마련이고, 나는 내 삶을 살아내기에도 바쁘다.


우리는 하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경외감이라고 말하는 게 더 옳겠다. 우러러보아야 하는 곳. 온갖 기상 현상이 일어나, 우리네에게 따듯한 햇살과 폭우를 동시에 안겨 주는 곳. 자연현상에, 하늘의 자비와 분노에 우리네 인류는 너무나 큰 감정 이입을 해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하늘은 우리를 돕는 거대한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곳엔 우리를 만들어 낸 절대자가 있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마음 가득히 들어차 있다.


그러나, 내게 '하늘'과 '스스로 돕는 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단연코 후자를 선택한다. 누워 있을 때 내 입으로 단감이 떨어지는 일은 삶에 있어 그리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를 가열차고도 처절하게 도왔지만 하늘은 움직이지 않았던 기억이 새록하다. 


삶의 방향을 그렇게 정한 계기는 다름 아닌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다.

사람은 중심이 없으면 휘둘린다. 귀가 얇아지고, 작은 감정의 파동에도 요동한다. 스스로를 옭아매기 일쑤고,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모든 되지 않는 탓은 내 것이 되고,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라 절망이라는 흙탕물을 스스로에게 끼얹는다.


그러나, 글쓰기는 끝내 내게 중심이 되었다.

써 본 적 없었으나, 그저 내 마음에 있는 걸 내어 놓았고. 배워 본 적 없으나, 그저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휘갈겼다. 내어 놓고 휘갈긴 그것들은 결국 나를 관통하였고, 뻥 뚫린 그 마음 사이로 마음에 켜켜이 쌓여있던 구정물과 시커멓게 타버린 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을 보며 나는 두려움을 느꼈으나 이내 그것은 통쾌함으로 바뀌었다.


무언가, 무게 중심이 저 허공에서 내 마음 한 곳에 자리 잡았음을 느낀 순간이었다.


글쓰기는 흩어져 있는 무게들을 내 한 곳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내 마음의 어느 곳에 균열이 생겼는지, 또 어느 한쪽으로 쏠리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을 주워 들면 그것은 원석이 되고, 그것들을 잘 닦아 놓으면 제법 멋진 무언가가 된다. 하나하나 그것을 쌓는다. 하나하나 그것들을 적어 내려간다. 쌓아 놓은 그곳은 이내 내게 있어 '중심'이 된다.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가 닿는다는 본능적 믿음이 있다.

그러하기에 종교가 없는 사람도 다급하면 신을 찾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두 손을 고이 모은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일종의 기도다.

하늘이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 그러나, 내가 먼저 움직이고 써야겠다는 다짐.


그러하기에 나는, 삶에 버겁거나 하늘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면 이렇게 스스로에게 읊조린다.


"하늘은 스스로 쓰는 자를 돕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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