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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08. 2022

글쓰기가 나를 자꾸만 꾸준하게 만든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나에게 꾸준하고 싶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글쓰기' 신봉자라 할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종용하지만, 그것은 수단으로써 일 뿐이다. 글쓰기에 대해 하도 강조를 하다 보니, 마치 글쓰기가 전부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글쓰기의 저 너머에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글쓰기는 '수단'이다.

아주 좋은 수단.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단. 그렇다면 수단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수단이라는 말 자체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말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글쓰기 저 너머엔 '목적하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그 목적은 바로 '자아'다.

내가 나 됨을 이루는 것.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를 알아가고 발견하고 치유하고 어르고 달래는데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다.


글을 쓰기 위해선 질문해야 한다.

질문을 했다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답을 내어 놓을 수 있다. 꼭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 정답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포기한다. 또는 그 답을 논리적으로, 그럴싸하게,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써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글쓰기를 멀리 둔다. 


아니다.

글쓰기는 내 고유의 것이다. 내 것을 내어 놓지 않은 것은 글쓰기라 할 수 없다. 그러니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아도 된다. 눈치는 나중에 실력이 늘었을 때 봐도 늦지 않다. 우선 내어 놓아야 되지 않겠는가. 걸음마도 떼지 않은 아이에게 100미터 달리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한테는 다들 그러고 있는 것이다. 내 것을 제대로 내어 놓기도 전에, 남의 눈치를 보려는 그 못된 습관은 누구에게서 왔을까? 


글쓰기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내 사례다. 나는 일생, 평생 꾸준한 적이 없었다. 뭐 하나를 진득하게 끝낸 적도 없다. 이런 나와 평생을 싸워왔다. 그러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나도 제법 꾸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게 왜 가능했을까?

나는 '나의 나됨'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자아'는 평생을 가도 완성할 수가 없다. 몇 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렇게나 다른데, 내가 어떻게 나를 다 규명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나를 다 안다는 것은 큰 착각이자 오만이다. 아마도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나에게 꾸준하고 싶다.

나를 좀 더 알아가고 싶고, 나를 덜 오해하고 싶다. 그러하기 위해 나는 쓴다. 글쓰기가 현재로선, 나를 '알아가는데'가장 훌륭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나를 자꾸만 꾸준하게 만든다.

그 너머엔, 나에게 꾸준하고 싶은 내 바람이 있다.


내 바람과 수단의 조화.

이것이, 내가 꾸준하게 글을 쓰는 이유라고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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