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Feb 12. 2022

발치(拔齒)

발치는 몸의 고통과 정신적 맑음을 가져다주었다.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것들이 삶에는 수두룩하다.

숨길 수 없는 무언가도 그것에 포함된다. 살아가면서 숨길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딱 떠오르는 것은 '사랑'이다. 그 오묘한 감정을 품으면 사람은 속과 겉이 변한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다. 어떻게든 티를 내고야 만다. 다음은 '재채기'다. 남녀노소,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성인군자조차도 그것을 참지 못하고 숨길 수 없다.


또 하나.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숨길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는 바로 '치통'이다. 우리 몸은 많은 고통을 느끼도록 되어 있지만, 웬만한 건 참거나 숨길 수 있다. 때론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안고 살아간다는 건 일상화가 되었다는 것이고, 일상의 고통은 사실 그리 티가 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치통은 일상화가 될 수 없는 고통이다. 그것은 신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고, 치통이 올라올 때 내 온 우주는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얼마 전부터 잇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피곤이나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비타민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어느 시일은 그 생각이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정이 되었더랬다. 그러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치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숨기고 싶었지만.

역시나 치통은 그러한 여지를 주지 않는다.


생각의 변화는 참으로 매섭고 간사하다.

잇몸 아픈 것으로 끝나길 바라다가, 그 고통이 심해지니 아예 그냥 이를 뽑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잇몸과 이의 부조화는 이별을 택했다. 발치를 한 것이다.


고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끝 모를 고통. 다른 한 가지는 끝 모를 고통을 끝내 줄 더 큰 고통.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끝 모를 고통을 달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 더 큰 고통을 감수할 것인가. 고통 앞에 사람은 좌절하기 일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정신이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고통은 정신을 맑게 하고, 깨어 있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더불어, 일상의 감사함을 일깨워주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이가 아파 라면도 제대로 끊어 먹지 못하는 고통을, 일상에서 상상조차 했겠는가.

고통이 가까이 있으면, 행복이나 깨달음도 가까이에 있다. 이것이 고통이 주는 삶의 역설이다.


고통을 끝내기 위해 택한 더 큰 고통은 이별과 맞닿아 있다.

덩그러니 놓인, 뽑힌 치아에서 나는 이별이라는 말을 읽었다. 젖니와의 이별은 당연한 것이지만, 영구치와의 이별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속은 후련했다. 잃은 것과 얻은 것. 깨달은 것과 다짐한 것. 이를 잘 관리한다고 해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 삶은 그런 것이라는 체념과 포용.


발치는 몸의 고통과 정신적 맑음을 가져다주었다.


내일은 또 어떤 것들과 이별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이별의 흔적들이 휑하지만, 어쩐지 채워지는 건 내 마음과 생각이라고 위로해본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주말에 자가용으로 대형 마트를 간다는 것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