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은 삶에게 던지는 내 '농(弄)'임을.
어느 하루가 그저 행복할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삶이 주는 선물이라 말한다. 모든 게 아름답고, 모든 게 순조로울 때. 그렇게 삶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날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삶은 버겁고 힘겹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두 손엔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잔뜩 주어져 있다. 어떤 것들은 좋아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끔찍해 보인다.
나는 가끔 삶이 왜 이것을 나에게 주는지 모르는 것을 받아 들고 당황스러워한다.
내가 주문한 것도 아니고, 바라 왔던 것도 아닌데 삶은 나에게 많은 것을 던진다. 문제는 그것이 일방적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 들었을 때,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죽도록 싫은 것들이 내게 왔을 때 나는 대체 삶에게 어떻게 복수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선물은 상대방이 기뻐할 때 성립된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선물은 강요다. 아무리 멋있는 포장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든 것이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라면 선물이라는 말을 붙일 이유도 가치도 없다.
그런데, 그때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에는 쓸모가 없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그때는 쓰레기라고 치부했던 것들이 이제서 내게 없으면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삶은 그렇게 농(弄)이다.
나를 희롱하는 자태가 참으로 꼴 사납니다.
일방적으로 내 던지는 건, 선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은 그렇게 일방적인 농이며, 그 농안에서 놀아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그렇게 놀아나다 보면 나 자신을 잊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손에 들린 것들을 자세히 보기로 했다. 그 모든 걸 선물이라 생각하고, 찬찬히 분류하여 차곡차곡 쌓는다.
언젠간 쓸모 있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삶이 주는 선물에 있어선 맥시멀 리스트가 되어야지 마음먹는다.
선물의 포장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방치하지 말고, 들고 있기에 끔찍한 것이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나는 이것이, 나를 희롱하는 삶에 덜 놀아나면서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라 생각한다.
삶이 주는 농에 웃고 울기 보단, 그 농을 받아쳐 웃고 울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존재의 수용이 아니라, 체념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아니하고 삶이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새로운 존재의 포용인 것이다.
어쩌면 그 포용은 삶에게 던지는 내 '농(弄)'임을.
나는 솔직히 두렵지만 그러하지 않은 자태와 마음으로 내 농을 삶에게 보낸다.
자, 이제.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