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반복이 아니라 지속이다

'일상'이 형벌이 되지 않으려면

by 스테르담
삶은?


삶은 불공평한 투쟁이다.

왜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왜 우리 삶에 개입을 하지 않는 건지 없다면 과연 우리는 왜 그토록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지도 커다란 의문이다. 이러한 물음표 하나하나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끝내 허무함만을 마주하게 된다. 명확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세계의 침묵 앞에 번번이 스러지고 만다. 이쯤 되면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고 만다.


이러하기에 '삶'은 '일상'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일상'은 '투쟁'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회의감과 허무함이 한가득인데, 우리는 어찌 되었건 매일의 삶 그러니까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때론 이것이 형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의도도 의미도 없는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저 하루라면 대충 살고 끝내면 될 텐데, 그러한 하루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이 '일상'이란 삶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삶은 부조리


이러한 의문과 불만이 모이고 쌓여갈 때쯤, 이 불공평한 기분을 나타내 줄 단어가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부조리'다. '부조리'는 '이치나 도리에 맞지 않음'을 말한다. 내가 느낀 첫 감정은 이 뜻과 같다. 당최 그 목적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삶은 이치나 도리에 전혀 맞지가 않다. 절대자의 멱살을 잡고 묻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하지 못하니 나는 허공에 대고서라도 주먹을 휘둘러야 했다. 이제껏 해왔고, 지금도 하고, 앞으로도 할 방황은 그러한 분노를 머금고 있다.


그런데, '부조리'라는 말엔 다른 뜻이 하나 더 있다.

그건,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 속에 처하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 한계 상황이나 조건'이다. 이는 알베르 까뮈가 말한 부조리의 뜻과 가깝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이라는 뜻을 넘어 '인간의 신분으로 넘을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와 그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위에 언급한 '인간의 절망적 한계 상황이나 조건'은 그가 말한 부조리와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알베르 까뮈가 부조리에 대해 말한 바를 알지 못했으나, 삶을 향해 부조리라 외쳤던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다르게 이야기해본다면, 알베르 까뮈도 삶에 대한 의문을 크게 가지고 있었고, 그의 일상도 어찌 보면 하루하루가 투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집필한 '시지프 신화'를 보면 합리적인 내 추론은 더 극명해진다.

시지프는 신의 노여움을 사 크고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용한 노동만큼 가혹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신들의 결정이었다. 절망스러운 과정을 거쳐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면, 그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다시 바위를 옮기기 위해 산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는 시지프의 모습은 이유도 모른 채 하루라는 일상을 시작하는 우리네와 똑같다.


알베르 까뮈는 이 운명이 비극인 이유는 시지프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까뮈는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프가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희망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의 고통은 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삶은 '반복'이 아니라 '지속'이다!


정리하면, 시지프는 돌을 계속해서 올려내야 하는 삶의 부조리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시지프는 그 부조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즉, 삶은 부조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그 어느 순간에라도 희망을 떠올리는 '저항 또는 투쟁'이라고 말했다.


부조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동시에, 그리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사색하고 또 사색하는 이유도 그 이유일 것이다.

부조리함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오늘도 내 삶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전엔 그 누군가의 의도일까를 생각해왔지만, 삶엔 그 누구의 의도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직, 삶엔 '의도'가 아닌 '의미'만이 있을 뿐이며, 그 '의미'는 결국 내가 세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해석하는 것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일상'이 형벌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반복'이 아니라 '지속'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복'이라는 주문에 걸려드는 순간, 삶의 주도권은 부조리한 세계로 귀속된다.

그러나, 이것을 '지속'이라 해석하고 그 의미를 헤아리는 순간 삶의 주도권은 내게로 온다. 그렇다고 삶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 다만, 나는 무겁고 큰 돌을 들어 올리며 이것이 이전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무엇임을 깨닫고 온 몸의 근육이 단련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순간순간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의식의 깨어있음이 비극이 아니라 비극만이 아닌 무언가, 그러니까 희극에 가까워지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일상은 '반복'이 아니라 '지속'이다.

의식은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하므로 세계와 나 사이엔 부조리가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저항하고 투쟁할 수 있다. 저항하고 투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만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만들어진 의미는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 있다.


이유 모를 삶이 전체적으로는 비극일지 몰라도, 일상의 순간순간을 희극으로 만들 수 있다면 비극과 희극은 희석될 수 있으며 아마도 삶은 그렇게 균형을 맞추어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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