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가 무어라도 쓰는 이유다.
한참 동안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머릿속을 아무리 휘저어도, 입으로 그것을 말하려 해 보아도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무엇. 그러나, 지난 어느 날 적어 놓았던 메모에서 나는 그것을 찾아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일도 있었다.
가족과 함께 지난 여행을 추억할 때. 서로의 기억이 달라 옥신각신한 것이다. 나와 첫째는 여행지에서 본 독특한 건물의 색이 파란색이라고 했고, 아내와 둘째는 그 색을 초록색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십여분을 그 추억 속에 헤매다 결국 그날의 사진을 찾아보기로 했다. 누가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게 아니니, 그 색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진 않겠지만 분명 그 건물의 색은 파란색과 초록색 둘 중 하나였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바꿔 말하면 기억은 기록을 벗어나 경거망동한다.
기억은 뚜렷이 주관적이다.
우리 뇌에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붙어 있는 건 우연일까. 기억은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감정에 따라 그것은 주관적으로 해석된다. 그 둘의 승패는 의미가 없다. 누가 먼저고, 누가 강력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 둘은 오히려 상호 보완 관계라고 보는 게 더 맞을 수 있다. 기억은 퇴색되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감정으로라도 그것을 메워야 하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둘의 옥신각신보다 한층 더 높은 지배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기록과 기억이 머리에서 일어나는 분투라면, 과연 마음의 요동은 누가 제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머릿속 복잡함 보다는 마음속의 그것이 우리에겐 더 큰 과제다. 이 요동을 제압하지 못하면, 꺼진 불이 다시 일어나 큰 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위험함의 불씨는 잔재한다. 꾹꾹 눌러 담은 마음과 감정은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고, 그 억압된 것들을 살펴 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우리는 마음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결론은 '글'이다.
그것도 내가 쓴 글.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듯이, 글은 마음을 지배한다. 그 지배구조는 강압적이지 않다. 글은 마음에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걸 받아줌으로써 마음을 포용한다. 포용하는 존재와 수단에 마음은 평온함을 찾는다. 더불어,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다. 내가 기록한 것과 기억하고 있는 것, 그것으로부터 느끼는 모든 감정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는데, 글쓰기는 이 모든 걸 기록하고 담아내고 복기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네 마음은 점차 안정을 되찾고, 안정을 되찾은 마음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힘이 된다.
결국 글은 기록과 기억 그리고 내 감정을 모두 아우르고 지배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글을 쓰는 존재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아니라 글을 쓰는 나.
그것이 본질이며, 이 본질이 가리키는 그 끝엔 '나 자신'이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 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라는 걸.
무의식은 나로 하여금 무어라도 쓰라고 오늘도 나를 종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