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클리셰

클리셰 따위는 없는 게 바로 삶이라는 클리셰다.

by 스테르담
진부한 클리셰는 왜 반복될까?


시한폭탄은 언제나 단 몇 초를 남기고 해제된다.

수백 수천발의 총알이 날아와도 주인공은 절대 맞지 않는다.

(맞더라도 목걸이나 품 속 펜던트가 주인공을 살린다.)

공포 영화에서 혼자 살겠다고 먼저 도망간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된다.

빌런은 주인공을 제 손에 두었을 때 곧장 죽이지 않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전쟁터에서 돌아가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겠다고 사진을 들고 흐뭇하게 웃는 병사는 곧 죽는다.


이처럼 영화에는 예측 가능한 공식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클리셰(cliché)'라고 부른다.


클리셰는 본래 인쇄 연판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자주 쓰이는 단어를 위해 때마다 조판하는 수고를 덜도록 따로 양식을 지정해 놓은 것이 클리셰의 본래 유래다. 그래서 클리셰를 논할 때, 판에 박은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의한다.


현대에는 클리셰가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사용된다.

앞서 말한 진부한 장면이나 판에 박힌 설정들이 전형적인 수법이나 표현으로 고착화되었다. 그것은 익숙한 내용으로 친근감을 조성하기도 하지만, 남발될 경우 해당 영화나 드라마를 진부하고 지루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클리셰는 뻔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왜 자주 사용되는 걸까?


클리셰 안에는 사회적 통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영화나 드라마의 이야기는 지속된다. 클리셰가 없으면 그 이야기는 멈춰버린다. 공식 안에 머물러야 관객도 안도한다. 그것을 벗어나면 관객들은 개연성을 운운하며 길을 잃는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영화나 드라마이므로, 안전한 길을 택하려는 제작자의 의도도 숨어 있다.


삶에도 클리셰가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다.

우선, 삶에는 클리셰가 있다. 저명한 인사들이 말한 모든 명언과 격언이 바로 그 증거다. '삶은 결국 이렇다'란 '진리'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일종의 '공식'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란 말이 있다. 부지런한 사람이 무엇 하나라도 더 얻는다는 말이다. 귀에 박힌 이 말은 '클리셰'다.


그러나 삶엔 '절대성'이 없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먼저 잡아 먹힌다'란 말이 생겨났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러니까 한 치 앞을 모르는 삶엔 '공식'이 없다. 고로, '클리셰'도 통하지 않는 게 삶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삶을 투영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가 우리네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클리셰


그럼에도 오늘도 난, 삶이라는 클리셰 안에 갇혀 있다.

불길한 예감은 벗어난 적이 없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만난다. 잠깐의 행복은 늘 더 큰 아쉬움을 가져다주고, 일확천금을 노려보지만 그것은 헛된 일임을 몸소 깨닫는다. 오전 6시 30분 알람은 어김없이 울리고 나는 출근을 해야 하며, 월급 이상의 것을 감내하며 오늘도 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나 내 삶은 영화 속 주인공과 다르다.

날아오를 수도 없고, 시공간을 초월할 수도 없다. 위기의 순간에 분명 주인공인 나를 도와줄 존재가 짠 하고 나타나야 클리셰가 완성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스스로 감내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기적 따윈 일어날 리가 없고, 내 주위 시한폭탄들은 몇 초를 남겨두고 멈추긴커녕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버린다.


우리네 삶에.

클리셰는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


아니, 클리셰 따위는 없는 게 바로 삶이라는 클리셰인 것이다.




나는 삶이 '농(弄)'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유를 모르고 태어나거나 왜 사는지, 삶의 끝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리 살아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농'에 갇혀 있다. 그것 자체가 클리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클리셰에 걸려들었다가 아니었다가를 우왕좌왕하는 삶은 영 못마땅하다.


부조리다.

그리고 나는 부조리에 저항한다.


판에 박힌 삶이라 생각했으나, 그 판을 뒤엎는 삶의 농을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여야 저항할 수 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저항할 수 없거니와, 저항할 수 있는 자라면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삶도, 클리셰도 진부하다.

다만 내가 유념해야 할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오마주를 추구하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삶에 역으로 던지는 나만의 진부하고도 처절한 클리셰다.




[브런치 x 와디즈 수상] 인문학 글쓰기 & 출간 펀딩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란한 마음을 글로 옮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