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부조리

삶이라는 부조리에 멋지게 반항하기를.

by 스테르담
삶과 죽음이라는 아이러니


삶은 이치에 맞지 않다.

우선,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를 전혀 모른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시간이 되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 뿐이다. '어렴풋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우리는 아직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는 것이, 내가 죽음을 잘 안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죽음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럼에도 '영원'에 대한 환상은 누구나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 누구도 영원을 이룬 자는 없으려니와, 우리가 아무리 앞날을 위해 열심히 산다고 한들 결국 미래는 우리네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죽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명쾌한 답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우리는 이미 부조리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가?
죽어가는가?


부조리란 본질적인 관념이고 제1의 진리다.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 하지만 비록 인간의 삶이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난 계속해서 오직 인간이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내 이성을 사용해 끊임없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적이지 못한'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래나 영원에 대해 희망이나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이다.

-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삶은 진퇴양난과도 같다.

무언가에, 누군가에 등 떠밀려 태어난 삶은 살아가지 아니할 수가 없고, 살아가자니 그 삶은 만만하지가 않다. 내게 불어오는 거대하고 센 바람을 마주하고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것과 같은데, 문제는 내가 왜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건지,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칫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음산함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것이 허무주의의 견해다.


그러나 알베르 까뮈는 허무주의로 빠질법한 그 길목에서 180도 방향을 바꾸었다.

'부조리한 인간'은 그가 지향하는 방향인데, 이것은 인간 그 자체가 부조리하다는 게 아니라 '부조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뜻한다. 즉,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을 지향한다.


'깨어 있다'란 것은 무엇인가?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언급한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부조리'를 마주한 사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자살하는 사람
둘째, 일상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셋째, 운명에 도전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반항적인 삶을 사는 사람


이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모든 이를 대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세 가지 중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일까, 죽어가는 것일까?

앞서 말한 세 가지 유형 중 우리가 어느 하나를 고른다면, 이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고,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스스로의)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존재하기 위한 존재와
반항이라는 무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가, 죽어가는 것이 중요한가?

어느 것이 더 의미 있고, 어느 것이 더 고결한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인정받고자 하고, 숨이 멎을듯한 사랑을 하며, 가슴 뒤는 일을 찾고 있다. 그래야 우리는 '존재함'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조리의 본질이다.

아이러니이자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존재는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면서도 오늘도 숨을 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시지프는 꾀를 부리다 영원히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면 그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가 처음부터 그것을 밀어 올려야 한다.


시지프의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는 건, 우리네 삶이 그 형벌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유모를 반복을 우리는 오늘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불행하기 짝이 없다. 반복에 갇히고, 의미 없는 일을 하고. 그를 바라보는 측은한 시선은 곧 우리네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임을 알아차릴 때. 그 형벌은 오롯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나 알베르 까뮈는 존재로서의 존재를 떠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각하는 능력. 나 여기 있고,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그로 인해 내가 오늘 얻은 건 무엇인가.


절망을 견디는 생을 긍정하는 것은 곧 내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의지다.

답을 알지 못하는 부조리한 카오스 속에서, 나 자신이라는 중심을 세우고 부조리에 반항하겠다는 건 곧 존재로서의 숙명인 것이다.


반항.

그것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고, 반항함으로써 그 존재는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이라는 부조리 안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앞서 이야기한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도 좋고, 그 외의 선택을 하는 것도 좋다. 답은 정해지지 않았다. 아니, 정답 따위는 없다.


그저 그나마 덜 틀린 것을 찾아가는 것이고, 덜 모호한 것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삶의 모호함이자, 그 모호함에 반항하는 삶의 방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에 반항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항을 하려면 살아 숨 쉴 때 해야 한다.

답을 모르면 질문을 바꿔하면 된다. 답을 찾지 못할 거라고 키득거리고 있는 절대자에게, 제대로 된 반항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대는 것이다.


이것이 알베르 까뮈가 말한 '생각하는 능력'이며, 나는 이것에 흔쾌히 동의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음을 자각하기를.

그리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삶이라는 부조리에 멋지게 반항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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