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일 뿐
사거리 교차로.
좌회전 신호를 받은 나는 서서히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갑자기 끼어든 차량이 내 앞 공간을 파고들었고, 나는 본의 아니게 좌회전 행렬의 끝에 걸려 있었다.
신호가 바뀌면 꼬리 물기를 한 모양새가 될 것이 뻔했기에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앞차가 갑자기 끼어들지 않았거나 또는 조금만 우측으로 빠져 공간을 내어 주면 내가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왜 저 차는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
하필이면 왜 내 앞에 저 차가 나타난 것일까?
무엇을 하려 해도 잘 안 되는 때가 있다.
이것이 그저 운이라고 하면 그나마 수용이 가능한데, 꼭 누군가가 엮여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그 누군가는 내 삶을 망치러 온 악마가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대체 누가 보낸 악마일까? 아니, 왜 내게 그 악마를 보낸 걸까?
살아가면서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만 없으면, 저 사람이 내 앞을 가로막지만 않았다면, 저 사람이 내 뒤에서 수군대지만 않았더라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지인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특히나, 모르는 사람으로 인해 무언가를 방해받으면 더없이 기분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시간이 촉박한 관공서 서류 업무를 하러 간 날.
내 주위 사람들은 아니나 다를까, 나와 같은 창구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설마 했으나 역시나. 게다가 내가 선 줄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챙겨 오지 않은 도장은 생각하지 않고 창구 직원과 실랑이를 벌인다. 그 사이, 옆으로 갈까 했던 창구의 줄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촉박한 시간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흐른다.
이러는 사이 분노는 머리 꼭대기를 지나 이미 열에너지로 변환된다.
왜 저 사람은 나를 괴롭히는가? 누가 보내 악마인가? 굳이 내 줄에 이런 사람이 서는 건 왜일까?
하나 확실한 건.
내 차 앞을 기어이 피고든 운전자와 도장 없이 실랑이를 벌이던 그 사람은 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기 위해 그러한 일을 벌인 게 아니란 뜻이다.
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네 동선은 마찰을 초래하거나 꼬일 수밖에 없다. 같은 방향, 다른 방향, 대각선 방향. 서로 다른 방향이 만나면, 그것은 교차되고 누군가에게는 방해가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똑바로 운전한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내 뒤에서 나를 답답하게 생각할 수 있다.
알고 보니 정말로 도장이 필요 없던 일이었으나 창구 직원의 실수로 실랑이가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저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일 뿐. 내 삶의 방향성과 방법이 누군가에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은, 우리네 모두는 그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향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여, 내게 보낸 악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충족시키려 아등바등하는 나와 같은 존재일 뿐이니까.
차에는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가 있다.
좌와 우 그리고 뒤를 보라는 의미다. 그러나 차의 주 본분은 앞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 삶도 그렇다. 후회와 반성 그리고 배려라는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가 있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방향성을 가진 우리는 기어이 부딪치고야 만다.
그 엇갈리는 방향의 소용돌이에서, 왜 저 사람은 내 방향을 방해하는 것이냐고 푸념만 할 것이 아니란 말이다.
각자는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내가 방해받았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방해를 선사했을 것이다.
어쩌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던 사람도 얼마든지 그 방향을 틀거나 역주행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 방향이다.
내가 잡은 운전대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틀거나 유지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의 방향에 대해 왈가왈부 하기보단 내 방향에 대한 확신을 키워가기를.
나는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곱씹고 또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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