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앞서 무언가 영감을 얻었을 때, 나는 바로 내가 쓸 글의 제목부터 짓는다. 그것도 아주 멋있게. 카피라이팅을 하는 것처럼. 결국 그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내 글을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는 그 멋있는 제목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잘 지어 놓은 제목 하나가 열 글 부럽지 않다는 나의 철칙이기도 하다.
이렇게 제목을 하나하나 모아가는 것이 바로 '제목 아카이빙'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브런치 작가의 서랍엔, 아직도 글로 써내지 못한 제목이 수 백개가 넘는다.
그 제목들을 보면, 나는 참 내어 놓을 게 많구나... 할 말이 많구나... 돌아봐야 할 게 많고 깨달은 것도 많구나... 란 생각을 한다.
사실, 나도 글을 쓰고 싶지 않을 때가 있고 또 무얼 써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아카이빙 해둔 제목을 하나하나 다시 읽는다.
마치, 쇼핑하는 것처럼.
무엇을 살까...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살피는 것처럼.
돈이 들지 않는, 아니 오히려 어떠한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이 과정을 나는 사랑한다.
소비자에서 생산자로의 삶을 선택한 나에겐 이 시간이 바로 희열이다.
제목을 쇼핑하는 건 '소비'라기보단 '생산'이다.
쇼핑 후에 나는 무언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득템 한 제목은 글로 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소비를 통해 희열을 얻었는데, 요즘은 생산을 함으로써 희열을 느낀다.
소비를 통한 희열 뒤엔 헛헛함이 뒤를 이었는데, 생산을 한 후의 희열은 또 다른 생산과 희열을 불러온다.
살아가다 보면 마음은 이내 헛헛해진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를 때도 많다. 원래 마음은 그러한 것이다. 꼭대기와 바닥을 세차게 오가는 변덕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우리는 그것을 제어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다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써야 한다. 마음은 제어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며 돌보고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조절은 '억압'이 되고, 억압된 것은 언제든 폭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헛헛할 때 글감 쇼핑을 한다.
무언가 지르고 싶은 마음을 글쓰기로 승화하는 것이다. 아, 글쓰기로 지른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다. 돈을 지르면 후회가 따라오지만, 글쓰기를 지르면 무언가가 더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쉽게 말해 희열이라고 한다면, 이 희열의 값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그 환산할 수 없는 걸 나는 되돌려 받는 것이니 심히 남고도 남는 장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