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와 사이가 좋지 못한 모든 번뇌와 갈등은 그것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완벽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완벽할 수 없으니까. 이것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젊은 시절에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좀 더 성장하고, 좀 덜 다쳤을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완벽'을 추구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어쩐지 '끝'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다. 젊은 날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 삶의 팔 할이었다. 무언가 좀 더 명확하다면, 나는 덜 요동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명확함'은 '끝'과 상통한다. 무언가가 명확하고, 어떠한 것이 완벽하다면 그것은 '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젊은 날의 나는 '끝'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 불확실한 지금을 벗어나기 위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그러나, 삶을 아는 사람은 '끝' 따윈, '완벽한 명확함' 따윈 없다는 걸 잘 안다.
삶은 원래 두렵고, 불안하고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이 고통은 삶의 주된 테마이지만, 명확하지 않아서 오는 즐거움도 분명 있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한 존재여서, 지루하게 선명한 것보다는 흐린 대로 흥미로운 걸 오히려 찾는다. 바쁘면 한가함을 떠올리고, 한가하면 무언가를 하려는 이중성이 오늘도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드는 것이다.
'끝'의 대척점에 있는 말을 나는 '과정'이라 칭한다.
그러니까 삶은 '과정'인 것이다. '끝'이란 '완벽'은 허상이다. 그것은 '과정'이란 삶의 절대성에 기인한다. 끝난 것이라 해도 다시 무언가가 시작된다면 그것은 '끝'이라 말할 수 없다. 잘게 썰린 '끝'이 있을지 몰라도, 이어지는 또 다른 무언가는 삶을 '끝'이 아닌 '과정'이라는 굴레로 이끌어 간다.
그러니, 완벽에 대한 추구는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완전해지려는 마음을 지니면 된다. '완벽'을 '과정'이라는 말에 끼워 맞추어본다면, 내 결론은 '완전함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