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시원함은 함께 온다.
나의 피로는 온통 종아리로 몰려온다.
어깨의 뭉침보다 종아리의 뻐근함이 내게 있어선 더 큰 해결 과제다. 때론 종아리의 뻐근함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 바로 마사지다.
마사지(Massage)라는 용어는 아라비아어인 'Massa(손으로 다룬다)'유래되었다.
고대 중국과 인도,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마사지의 흔적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서양의 단순한 마찰이나 압박 등의 수기법보다 더 체계화된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게 그 특성이다.
마침내 갈구하던 마사지를 받는다.
그런데, 왠지 생각이 많아진다.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극락을 맛봐야 하는 그 순간. 왜 그리고 어떤 생각들이 떠오른 것일까?
삶이 떠올라서다.
마사지를 받는 그 순간, 그것과 삶의 공통점이 열렬히 떠올랐다.
몸의 노곤함과 함께 떠오른 또렷한 정신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마사지'는 손이나 기타 접촉을 통해 상대의 피부는 물론 신체 연부조직 (근筋, 건腱, 근막筋膜) 부위에 영향을 주어 이상 증상을 정상화시키는 치료행위로 정의된다.
쉽게 이야기하면, 피곤이라는 자극(고통)에 더 큰 자극(고통)을 주어 완화한다는 이야기다.
마사지를 받을 때,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아프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어떤 때는 아프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들어 내가 왜 돈을 주고 이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잠시, 이내 고통은 찾아들며 그 과정에서 무언가 풀리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마사지는 더 큰 고통을 주어 이전의 고통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삶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어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다가, 더 큰 고통이 오면 이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단련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근육에 반복적인 고통을 주어야 근육이 형성되는 것처럼, 삶에서 맞이하는 고통들은 우리네를 더 성장시킨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생길수록, 더 큰 고통으로 다른 고통을 다스릴수록.
삶의 중간중간 우리는 무언가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 피로는 종아리에 결집되어 있다.
그러나 종아리만 마사지를 해주는 곳을 찾은 적이 없다. 전체적으로 관리를 받아야 한다. 이전에 어느 분께 종아리만 집중해서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분은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를 하지 못했다. 그 분만의 노하우와 전체를 관리하는 역량이 있는데, 종아리를 집중적으로 해달라고 하니 그 밸런스가 깨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신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종아리도 시원하게 받지 못한 기억이 난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마사지를 받아야 하는 곳과 받고 싶은 부위. 건강과 피로 해소의 관점이라면, 어느 특정 부위가 아닌 전체적인 마사지가 더 효과적이다. 마사지를 받는 1시간이나 2시간 내내 특정 부위만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다. 삶에서도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순 없다. 오히려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고 싶은 일이 가능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없다는 게 마사지에서도 상통한다.
재밌는 것은, 원하는 곳이 아닌 부위에 압력이 가해질 때 더 시원할 때가 있으며 이곳이 내가 원하던 곳이란 걸, 또는 피로가 풀려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아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마사지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인생이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이라는 연을 맺고, 학교 생활을 하며 친구를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동반자를 만나거나 동료를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좋은 인연의 사람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마사지를 해주시는 분과의 만남은 돈과 시간에 대한 가치를 좌우한다.
어느 분에게 어떻게 마사지를 받느냐에 따라 만족도는 극과 극을 향한다. 정말 시원한 만족도 높은 만남이 있는가 하면, 그저 아프기만 하거나 설렁설렁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만남도 있다. 재밌는 건, 같은 분께 마사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날의 서로의 감정이나 컨디션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신이 우리네에게 행복이라는 시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균형을 맞추면 우리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그 균형이 맞는 때는 그리 많지 않으며 설령 균형이 맞추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간이다.
'행복은 순간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돌이켜 보자. 우리가 행복을 느꼈던 순간을. 질문 자체에 이미 '순간'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행복은 지속될 수 없으며, 지속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된다. 배가 고파 무언가를 먹으면 우리는 순간 행복해지지만, 잠시 후면 배부름과 더부룩함에 먹은 걸 후회하는 때가 온다.
마사지를 통해 느끼는 시원함(=행복)도 순간이다.
그 순간을 다시 느끼고 싶어 우리는 다시 마사지를 찾게 되는 것이다. 행복의 순간을 기억하고, 다시 그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 삶처럼.
어른이 되면서 깨달은 건데, 우리 삶엔 '돈'과 '시간'이 결부되지 않은 활동은 아무것도 없다.
가족도 '돈'과 '시간'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공동체이며, 우리가 하는 일이나 소비 그리고 생산은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되기까지는 원시시대부터 수많은 좌충우돌이 있었고 그 갈등과 해프닝 속에 '돈'과 '시간'이라는 삶의 조건과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사지는 '돈'과 '시간'이라는 투자로 가능하다.
돈을 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그 시원함을 효용 할 수 없다. 반대로, 돈을 내지 않았다면 온전한 마사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느 정도의 행복을 얻으려 하거나, 무언가를 시작하려 한다면 그 둘 모두가 있어야 한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고, 시간이 돈을 만들어 내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종아리의 피로함이 아직 남은 채 마사지가 끝난다.
어깻죽지는 아파 죽겠고, 허벅지를 누를 때의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혼합되어 마침내 마사지는 완성된다. 아프고 좋지 않은 느낌 이후, 나는 오히려 시원함을 느낀다. 누르지 않으면 몰랐을 피로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며 남은 게 바로 그 고통이 아닐까 싶다. 약은 입에 쓰듯이, 좋은 지압은 몸에 쓰다. 간질간질 원하는 곳만 받는 게 아니라, 아픈 곳을 찾아내어 피로를 누그러뜨리는 게 마사지의 본질이란 걸 새삼 깨우친다.
어쩌면 삶은 내 영혼을 치료하는 마사지사 일지 모른다.
어느 부위를 할 땐 너무나 시원하고, 또 어느 부위를 짓누를 땐 욕이 나올 정도로 아픈 그 모습을 떠올리니. 삶은 내가 건강해지길 바라며 이곳저곳을 압박하고 누르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 아픔을 느끼는 구간에, 나는 더 성장하고 강해질 수 있으며 고통이 지나간 자리엔 시원함이 남겠지... 란 생각으로 오늘의 고통을 머금는다.
고통과 시원함은 함께 온다.
아픔과 행복도 따로 오지 않는다.
돈과 시간을 투자하며, 새삼 알고 있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