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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01. 2022

'어쩔 수 없다'란 말이 좋다

나를 '현재'에 있게 하는 말

"아니, 그게 왜 안되는데?"
"그거 하기가 그리 어려워?"
"해보기는 한 거야?"
"너보다 더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도 해냈잖아!"
"이러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너를 앞서 나가고 있다고!"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했더니, 모두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다그침 들이다.

'소리'는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에도 청각을 감지하는 기관이 분명 있다. 소란함은 귀와 마음 모두로부터다.


부정할 수 없는 건 이와 같은 소란함으로 나는 무언가를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윽박지르지 않으면, 다그치지 않으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하므로 나는 스스로에게 완벽을 요구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최면을 건다.


그러나 마음에 올라차 오르는 헛헛함은 소란함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헛헛함은 어디에서 올까. 허무함과 허전함을 느낄 여유가 있을까.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하고, 뛰지 않으면 뒤처지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그것을 파헤칠 가치가 있을까?


삶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내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 모든 게 착각이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보면서 혼란함과 함께 나는 말 그대로 그로기 상태가 된다.


노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 모든 건 그저 운이었을까?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은 왜 이것밖에 안되는가?


마음에 소란함이 가득하면, 모든 게 부조리고 모두가 나의 적이다.

그저 나를 더 많이 다그치는 날이 늘어날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신기하게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고 젊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엔 듣지 못했던 목소리. 아니, 어쩌면 애써 외면하거나 꾹 눌러왔던 소리.


'어쩔 수 없지, 뭐.'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이 생각났을 때, 스스로를 배로 다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지금의 나는 이것으로부터 편안함을 느낀다.


패배자와 포기자가 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왜 이 말은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일까?


'헛헛함'의 근원은 '자아의 부재'다.

저 산 꼭대기의 깃발을 쟁취하거나, 끝없는 소비로 채우려 했던 그때를 돌아보면 성취와 물건은 남았으나 '나'란 존재는 없었다. 방향도 모른 채 우선 뛰라는 소리에 나는 그저 내달렸을 뿐이다. 이러해야 하고, 저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껍데기가 그저 나인 줄로만 알고 살아왔다.


인디언은 말을 달리다 잠시 멈춘다.

걸음 느린 자신의 영혼이 따라올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잠시 멈추는 데에도 우리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넘어질까, 뒤처질까, 도태될까. 우울하면 과거에 붙잡힌 것이고, 불안하다면 미래에 저당 잡힌 것이다. 마음이 편하다면 현재를 사는 것인데, '어쩔 수 없다'란 생각은 나를 '현재'에 있게 한다. 수긍하고 표현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들과 싸워온 지난날을 돌아볼 때, 이것은 매우 효율적인 삶의 자세다.

냉랭한 세상, 변하지 않는 사람들. 그것들을 바꾸려 했던 내 모든 노력과 다그침은 비효율의 극치다.


단순한 체념이 되지 않도록, 나는 내가 할 일을 묵묵히 해낼 것이다.

그러하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나는 수용하고 포용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뭐.'

어쩐지 이 말속엔 여기까지 잘 왔다는, 나를 향한 위로와 응원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달리던 말을 잠시 멈추고 나를 챙겨 또 앞으로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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