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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12. 2022

직장인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까

직장인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직장인만큼 노력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노력(努力)'이란 단어는 '힘쓸 노'자와 '힘 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힘'이란 말이 중복되어 있죠. 이는 노력이란 말이 얼마나 절실하고 고단한 것인가를 잘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위한 '힘'일까요? 

'노력'의 사전적 정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를 씀. 또는 그렇게 들인 힘'입니다. 그렇다면 직장인인 우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양할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목적을 모두어보면 '먹고살기 위함'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자아실현'이라고 이야기하는 소수(?)의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먹고사는 것이 해소된 다음의 이야기라는 부분에 대해 동의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의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먹고살기 위해선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운명은 그리도 얄궂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노력하지 않으면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미 우리는 노력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력을 위해 노력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시대가 그렇습니다. 현대화된 시대, 복잡성이 올라가고 고도화된 시대. 경쟁이 점점 더 심해지는 시대. '노오오오력'이란 신조어가 탄생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저는 제 저서인 <직장 내공>에서 '직장'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원론적 정의: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는 곳

새로운 정의: (회사 체질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하기 싫은 또는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곳


회사 체질이 아닌 우리는, 원하지 않는 '페르소나'를 무수히 쓰게 됩니다. 

'직급'과 '직책'이라는 그 가면의 두께와 무게는 상당합니다. 때로는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해야 합니다. 그것에서 오는 자아분열과 그 괴리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극한의 상황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비겁함'과 '나 스럽지 않음'은 트라우마가 되기도 합니다.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나도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구나', '나도 그저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구나'란 탄식을 안 해 본 직장인이 있을까요?


'하기 싫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은 직장인이 행복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죠. 


자, 이렇게 보면 우리네 직장인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새삼 다시 느끼게 되실 겁니다.


노력의 상징,
괴테의 파우스트


뜬금없이 독일의 대 문호 '괴테'를 잠시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파우스트 박사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야기라는 것쯤은 아실 겁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 깊었습니다.

온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이 깊었기에, 어쩌면 그래서 악마의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갔는지도 모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노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세상 모든 쾌락과 악행을 맛보았습니다. 순진한 처녀인 그레트헨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되고, 그 결과는 그레트헨 가족의 몰살이라는 참혹한 비극으로 끝을 맺습니다. 둘이서 남몰래 연애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죽고, 오빠도 죽습니다. 둘 사이의 사랑의 열매인 아이는 물에 빠뜨려 익사시킵니다. 그레트헨은 영아 살해범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이후, 파우스트 박사는 그레트헨은 안중에도 없이, 온갖 욕정을 불태우고 쾌락을 맛봅니다.


이러한 파우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끝내 그레트헨의 간절한 요청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파우스트에게 구원을 선사한 절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착한 인간은 어두운 욕망 한가운데서도 올바른 길을 알고 있는 법이네."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까


직장인의 노력을 이야기하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불러내었으니 이제 그 갑작스러운 간극에 대해 설명을 해드려야겠죠.


그 이유는 세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혼', '노력' 그리고 '방황'.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네 직장인은 이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요.


먼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직장에서 우리의 영혼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첫째, 영혼을 팔거나. 

둘째, 영혼을 갈아 넣거나.

셋째, 영혼을 없애거나.


영혼을 파는 경우는 그 어떤 욕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일 겁니다.

욕심은 나쁜 게 아닙니다. 월급과 승진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직장인에게, 욕심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직장 안에서 꿈을 꾸고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면, 이젠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반복되면 어느샌가 우리는 슬럼프나 번아웃을 맞이하게 되고 마침내 영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이죠.


다음은 '노력'과 '방황'을 함께 이야기해볼까요.

영혼을 갈아 넣거나, 영혼이 없어진 그 어느 상황. 때론 노력하기 위해 영혼을 끌어 모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데 영혼을 다 소진하고 나면, 어느 순간 영혼은 사라지고 말겠죠. 슬럼프나 번아웃 같은 방황이 시작되는 겁니다.




직장인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착한 직장인은 없습니다.

때론 사회적 괴물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생존해야 하니까요.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어떻게든 직장인은 노력해야 합니다.


변해 가는 모습에 괴리감은 커집니다.

영혼을 팔고, 갈아 넣고, 없애가며 그 간극을 줄이려 하지만 월급을 받는 한 그건 불가능합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어쩌면 내가 바라는 모습과 더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회사가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회사에 맞춰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물론, 퇴사라는 또 다른 옵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직장밖에 가면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더 큰 사회적 괴리감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월급을 받는 것, 버는 것을 넘어 이제는 돈을 직접 만들어야 하니까요.


요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노력하는 한 말이죠. 더불어, 노력을 멈출 순 없습니다. 코로 숨을 쉬는 한 그렇습니다. 그러니 방황은 계속될 겁니다. 노력도 계속될 겁니다. 괴리감도 계속될 겁니다.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맙시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건 우리네 운명입니다. 거스르지 말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온갖 악행(?)을 행한 파우스트 박사도 구원받았습니다. '노력'과 '방황'이라는 미명 하에 말이죠.


훗날, 우리가 노력하고 방황한 모든 것들은 용서받을 겁니다.

아마도 절대자는 용서와 함께 파우스트 박사에게 했던 말을 우리에게도 할 겁니다.


 "직장인은 어두운 욕망 한가운데서도 올바른 길을 알고 있는 법이네."


노력합시다.

방황합시다.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저를 포함한 모든 직장인 분들의 노력과 방황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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