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직업병, 슬럼프
직장인에게 슬럼프는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좀 더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별로 였던 사람도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처럼, 슬럼프도 꽤 친근한 구석이 있다는 걸. 심리학에서 말하는, 만남을 거듭할수록 호감을 갖게 된다는 '단순 노출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슬럼프가 삼 년 단위로 온다고 하지만, 요즘은 세 달, 삼 주, 하루에 세 번 심지어는 세 시간마다 오기도 하니까. 직장인의 삶은 그렇게 고달프면서도 다이나믹한 것이다.
그러니, 이쯤 되면 슬럼프는 직장인의 직업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럼프는 감기다
친근해서 그런지 슬럼프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바뀐다.
밑도 끝도 없는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지난날의 슬럼프를 되돌아보면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었다. 어느 방향인지 모르고 뛰어가던 나를 잠시 멈춰 세운 것도 슬럼프였다.
심한 몸살감기는 면역력을 약하다는 신호이자, 몸을 챙기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감기는 누구나 쉽게 걸리고, 나와 너가 동시에, 또는 나와 너 중 하나만 걸릴 수도 있다. 한바탕 푹 자고 일어나거나, 열병에 아파 땀을 뻘뻘 흘리며 아픈 뒤에 자신을 더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갖게 하는 게 어쩐지, 감기와 슬럼프가 서로를 닮았단 생각이다.
내 열정에 취해 다른 사람이 아픈지도 모르고, 반대로 내가 아프면 세상 모든 열정이 사라지는 것처럼.
내가 괜찮으면 다른 사람의 슬럼프가 보이지 않고, 내가 슬럼프면 남의 열정이 과해 보이는 것이다.
나의 슬럼프, 절대 알리지 말 것!
슬럼프는 직장인에게 감기와 같이 오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절대, 내가 슬럼프라는 것을 말하지 말 것!"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 슬럼프에 관심이 없고, 있다면 내 슬럼프를 즐기거나 수군대는 사람들뿐이다. 내가 슬럼프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공감하고 위로해줄 것 같지만, 깊은 내면에서 진심으로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슬럼프라고 해서 나에게 와야 할 일이 오지 않는 경우는 없다. 업무상 발생하는 부족함의 일거수일투족은 슬럼프와 연관이 된다.
"이 과장 슬럼프래. 그래서 그런가, 영 시원치가 않아. 보고서가 엉망이야, 엉망."
더불어, 그 소문은 발 없는 천리마와도 같다.
"김 대리 잘 지내? 요즘 슬럼프라며?"
나를 경쟁자로 여기는 사람에겐 아주 좋은 떡밥이자,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의 인사는 다시 피어오르는 내 열정을 꺾어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누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농담이든 진담이든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같은 시국엔 더 그럴 것이다. 즉, 일로 만난 사이에서 뼛속까지 깊은 공감과 위로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내가 아프면 나의 아픔을 알아줄 거란 생각은 직장 밖에서나 하는 것이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직장엔 나의 아픔을 악용하는 사람이 분명 있다.
슬럼프가 왔을 땐, 그러니 나 홀로 조용히 슬럼프를 맞이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슬럼프가 오면 소중한 손님처럼, 누구도 볼 수 없는 조용한 방으로 불러 슬럼프가 떠날 때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엔 왜 왔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어서 왔는지, 내가 잊고 지나온 것들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절대, 언제 갈 거냐고 종용하며 채근하지 않는다. 그러면 슬럼프는, 머지않아 나에게 여러 가지 보따리를 풀어놓고 생각보다 빨리, 홀연히 사라진다. 인사도 없이 가는 게 섭섭할 만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건, 아군의 사기를 위해서였다.
나의 슬럼프를 누구에게라도 절대로 알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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