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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26. 2016

글을 쓰자 책이 고파졌다.

고프다. 책이, 생각이, 지식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난 게으르지도, 그렇다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바지런한 사람들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여가활동을 가지거나 하는 경지에는 못 이르지만, 그렇다고 출근 정시에 1루에서 2루 도루하듯이 가까스로 세이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시 어느 한 지점의 조금은 이른 시간을 꾸준히 고집하는 편이다. 어느 정도는 성실하다고 표현할  있지만 부지런함으로 포장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그러니까 이토록 별것 아닌 것을 중언부언할 정도로 그저 그런 정도란 이야기다. 어쩌면 그저 보통이란 말로 대변할 수 있을지도.


물론 부지런하고 바지런한 것에 대한 동경은 누구보다 크다. 그 두 가지의 것에 공통된 또 하나의 단어는 '꾸준함'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꾸준함'을 동경해온 나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꾸준하지 못했단 이야기다. 동경은 '흔히 겪어 보지 못한 대상에 대하여 우러르는 마음으로 그리워하여 간절히 생각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아직도 동경만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단 생각도 든다.


나에게 있어 '꾸준함'의 척도 중 하나는 바로 '독서'였다. 책을 선정하고 책상 위에 고이 펼쳐 놓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앉은자리에서 책 한 권을 끝내는 것. 그리고 한 달에 몇 권, 그러니까 그 자세로 수권 내지는 수십 권을 일정한 시간 내에 읽어내는 것이 내가 동경하는 꾸준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면 나는 나 자신을 매우 '꾸준한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었겠고, 아마 스스로를 동경해마지않았을 것이다.


책 읽기는 힘들다. 그래서 안 읽는다.


꾸준하지 않은 나는 책상 앞에 정적(靜的)으로 앉아, 양 갈래를 고고하게 펼치고 어디 한 번 자신을 꾸준하게 탐닉해보라는 유혹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 동경은 하나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니 스스로도 한심하다. 나의 동경은 그 유혹에 쉽사리 넘어가는 것이므로. 이유를 생각해보건대, 시작해서 단 몇 장 밖에 집중을 하지 못할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통쾌한 통찰력에 시작하는 것 조차 두려운 것이 가장 크다. 비겁한 변명에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이면서 실제로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책 읽기는 나와 소원한 그 무엇이다.


물론, 살다 보면 아주 가끔은 한 자리에서 스스로를 대견해할 정도로 독서에 탐닉하는 경우도 있긴 있었다. 추리 과정이 흥미진진한 홈즈 시리즈나 언젠가 한 때 유행했던 퇴마록, 또는 심적으로 힘들 때 읽었던 필요에 의한 자기계발서 몇 권이 그러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정말 몇 안 되는 장면들이었고, 독서의 취향을 보면 편식이 매우 심했었다. 중간중간 읽었던 몇몇 소설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도 많이 읽은 적이 있다. 시간을 내서가 아니라, 시간이 나서.


아, 또 하나. 그래. 그나마 살면서 양적, 질적으로 내가 동경한 그것과 조금은 가까운 '독서'에 매진한 때도 있긴 있었다. 살면서 가장 많은 책을 그 종류에 구애 없이 왕성하게 소화했던 그때는 바로 군대 시절이었다. 계급이 낮은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계급이 차오르니 여가 시간이 많아졌고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독서'를 한다는 것이 그리 짜릿했다. 허송세월을 의미 있게 채워간다는 자위가 제법 스스로에게 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은 땅을 굴렀을지언정,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어서 많은 양의 책을 읽어도 머리로 그것들을 소화 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육체의 고단함과 정신의 배고픔이 만들어낸 최적의 시간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독서는 시간이 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라고. 부지런하지도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은 내가, 그것도 동경하는 꾸준함을 아직도 이루지 못한 내가 그 많은 책을 읽고 질적으로 소화한 그때는 바로 '시간이 났을 때'였다. 그래서 스스로 성에 차지 않는다. 아직은 '시간을 내서' 읽은 경지가 아니므로. 누군가 나를 '시간을 내서'만나 주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만 만나준다면 기분이 어떨까?


글을 쓰다 보니 고프다. 책이, 생각이, 지식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런 주제에 어느덧 시작한 글 쓰기는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대화하듯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이 써 내려간 글들을 나중에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간혹, 정말 아주 간혹은 스스로 한 나도 모르는 제법 그럴싸한 표현들이나 문맥이 나로 하여금 미소 짓게 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즐거움은 나로 하여금 하나하나 더 많은 글쓰기에 도전하게 하면서.


처음엔 순조로웠다. 머리 속에 떠오른 많은 아이디어들과 글의 소재들이 나를 끄집어내 달라 아우성이었다. 때로는 어느 하나의 주제나 소재로 앉은자리에서 몇 분이면 글 하나가 뚝딱 만들어지곤 했다. 스스로 대견할 정도였다. 물론 그 질이나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저 쓰지 않던 글을 쓰고 무언가 실행에 옮긴 만족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머리 속의 소재들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고갈'이라는 단어가 천연자원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천연자원은 그 옛날부터 언젠가 '고갈'될 거란 위협을 받아왔지만 아직도 건재한 반면, 나의 지식은 '고갈'이라는 단어를 모두 되뇌기 이전에 이미 '고갈'되고 말았다.


아, 이래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하는구나. 단순한 지식만을 위한 것이 아닌. 생각을 하기 위해, 그리고 사고의 방법을 익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들을 보며 영감을 얻기 위해. 종내에는 나를 생각하고 돌아보기 위해. 생각해보니 그나마 그저 실오라기 같은 글이라도 쓸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읽었던, 기억도 하지 못해왔던 언젠가 읽은 책의 영향일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글을 쓰니 이러한 것을 느낀다. 머리가 고픈 느낌. 허기지고 힘 빠지고. 뇌가 당 떨어진 느낌.

이제는 시간을 내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이 드는걸 보아하니 그래도 한낱 작은 의지라도 있다는 것에 스스로 위로가 된다. 쓰고 채우고, 채우니 또 쓰고. 앞으로의 글쓰기에 기대를 걸어본다. 그러다 보면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나라는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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