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질리지 않아서 진리지

질려하지 않는 마음으로, 삶을 바라봐야겠다.

by 스테르담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네 바다는 하나의 웅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다른 은하에서 본다면 설거지 후 남아 있는 그릇의 물기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 '물기' 앞에서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바다를 마주한 모든 사람들은 표정과 마음의 무장해제를 당하는데, 그 앞에선 '남녀노소', '지위고하'가 따로 없다. 마음이 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마음을 졸이며 산다. 행복해지려 사는 날보단, 덜 불행해지려고 발버둥 치는 날이 더 많다. 마음을 졸이고 졸이다 보면 언젠간 본능적으로 바다를 찾게 되어 있다. 그 누구라도 마음 졸이지 않으며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웅장하게 고여 무어라도 다 받아줄 것만 같은 존재를 마주해 졸인 마음의 매듭을 풀어야 하니까.


나는 다양한 바다를 마주했다.

한국의 동해, 서해, 남해는 물론. 유럽에서 바라본 지중해, 그린란드 해, 지브롤터 해, 아드리아해, 북해. 노르웨이 해. 발트해. 중동의 아라비아해. 아시아의 남중국해, 반다 해, 동중국해. 중남미의 카리브해 등.

뜨는 해가 유명한 바다부터, 지는 해가 아름다운 바다. 조개구이가 맛있는 바다부터, 굴과 가재를 음미할 수 있는 바다. 해수욕하기 좋은 바다부터,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바다까지.


다양한 그 바다에서, 나는 다양한 걸 쏟아내었다.

아마도 그 졸인 보따리에선 기쁨과 슬픔, 노여움과 용서, 보람과 후회, 행복과 그러하지 않은 마음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는 그 모든 걸 받아주었다. 내 것뿐만 아니라, 그 바다를 찾은 전 세계인들의 모든 걸.


그래서 바다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전 세계인의 고민을 그대로 다 수용하고 포용하니, 그 내공은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 바다는 아무 말 없지만, 그것을 마주한 우리는 고해성사를 시작하고 마니까. 왠지 모를 위로를 가득 안고 뒤돌아서게 되니까 말이다.


흐르는 것과 고여 있는 것엔 치유의 능력이 있다.

바다의 웅장한 고임은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포부다. 나는 바다의 그 마음을 닮고 싶다. 어설프게 고인 물은 썩지만, 웅장하게 고인 물은 바다가 된다. 바다는 여기저기서 흘러오는 모든 물을 수용하고 포용한다. 그러니까, 내가 닮고 싶은 마음은 바다의 '수용'과 '포용'인 것이다.


살다 보면 삶이 질릴 때가 있다.

질리고 질리다 보면 넌더리가 날 때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치유다. 치유는 '수용'과 '포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하지 않으면 병이 드는 건 내 마음이다. 바다와 같이 웅장해지진 못하더라도, 나 하나 치유할 수 있는 웅장함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바다는 질리지 않는다.

언제 봐도 좋다. 그래서 진리다.


나는 삶도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질리지 않게. 넌더리 나지 않게.


수용하고 포용하면 그리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바다'와 '삶'은 언제나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무언가가 질리고 넌더리 났던 이유는, 내가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 뿐.


갑작스레 옹졸한 내 마음의 크기가 부끄러워진다.

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바다의 웅장함과 내 마음의 옹졸함이 구분되지 않을 무엇이겠지만, '나'라는 우주에서 내 마음은 바다 이상의 크기를 지녔기에.


진리는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질려하지 않는 마음으로, 삶을 바라봐야겠다.


그 다짐을 잊을만할 때.

나는 다시 바다 앞에 서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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