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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13. 2022

글의 양을 늘리는 방법

양이 늘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양의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


나는 양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그것을 종용한다.


글의 양이 늘수록,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내 하나의 글이 늘어날수록, 글쓰기에 대한 애정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꾸준한 글쓰기 앞에 우리가 무너지는 이유는 완벽한 글을 내어 놓으려 할 때다. 세상에 완벽한 글은 없다. 그저 쓰고, 그저 내어 놓은 글만이 있을 뿐이다. 많이 써야 한다. 많이 내어 놓어야 한다. 그리하면, 개중엔 완벽에 가까운 글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완벽에 가깝지 않은 글들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모든 글은 내 자산이 되며, 내 세계관이 된다. 일단. 쓰면 남는다. 글을 써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손해라면 쓰지 않아 벌어지는 경우가 우리네 삶엔 더 많다.


매 타석에 들어서 홈런을 치는 야구 선수는 없다.

매 경기에서 골을 넣는 축구선수도 없다. 많이 휘두르고, 많이 차는 '양의 행동'에서 성과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노력과 반복은 양으로 축적되고, 그것은 하나 둘 성과로 이어진다.


양의 글쓰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양의 글쓰기'.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 쓰기, 자주 쓰기, 내내 쓰기가 정도(正道) 일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도 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걸 내어 놓으려 하기보단, 나 자신을 돌아보듯. 내 글을 돌아보면 글의 양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유명한 시인인 TS 엘리엇은 '어설픈 시인은 흉내 내고, 노련한 시인은 훔친다'란 말을 했다.

피카소도 이를 '평범한 사람은 모방하고, 천재는 훔친다'란 말로 동의했다. 즉, 글의 양을 늘리기 위한 방법이 새로운 창작에만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모방'과 '훔침'은 다름 아닌 내 글로도 가능하다.


첫째, 이전 글을 퇴고하여 새로 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쓴 예전의 글을 잘 읽으려 하지 않는다.

때론, 그러한 글을 썼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 당장 예전에 어디라도 쓴 글을 한번 찾아보자. 분명 어디엔간 남아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유쾌하지 않지만.

예전에 쓴 내 부족한 글을 마주하는 것은 꽤 의미가 있다. 과거의 나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이제.

그 글을 퇴고하면 된다. 퇴고하면 그 글은 환골탈태하게 된다. 퇴고라고 어려운 게 아니다. 이전의 글을 쭈욱 읽어보기만 해도 된다. 그러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감이 오게 된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만 바뀌어도 좋다. 장담하건대, 사실 그 이상의 것들이 튀어나오고 발견될 것이다. 어쩌면 전체를 다 갈아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퇴고의 백미다. 다시 태어나는 글은 지금의 나를 반영한다.


퇴고하여 새롭게 태어난 글은, 내 글의 모수를 늘리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둘째, 같은 주제를 다르게 써 본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의 글감 = 하나의 글'이란 생각을 한다.

즉, 내가 어떠한 주제에 대해 썼다면.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쓰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또는 같은 주제로 써낼 필력이나 감흥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주제로도 여러 개의 글을 써낼 수 있다.

장르를 바꾸면 된다. 예를 들어, '시간'이란 주제로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에세이로 이 주제를 풀어낼 땐, 내가 겪었던 시간에 대한 에피소드를 쓰면 된다. 만약, 자기 계발이란 장르로 이것을 풀어낸다면? 개인적인 에피소드보단 시간에 대한 어떠한 이론이나, 개념에 대해 좀 더 집중하면 된다.


그렇다면 같은 주제라도 다른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


셋째, (해석을 달리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르게 전한다.


두 번째와 이어지는 맥락이다.

같은 주제에 대해 '장르'를 달리하는 방법도 있지만, '메시지'를 달리 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메시지는 작가의 '해석'으로 탄생한다.

내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오늘의 나를 만든다. 그러니까 오늘의 우리는 지난날 세상에 대한 내 해석의 결과다.


'견디기'라는 주제로 글을 써본다면.

'견디기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역동적인 나의 선택이다'라고 그것을 옹호할 수도 있고, '무조건 견디는 게 좋은 건 아니다. 변화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좋다'라고 그 방향을 선회할 수도 있다. 일관적이지 않은 메시지로 인식될까 걱정할 필요 없다. 그에 맞는 상황과 논거를 제시하면 된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삶은 고정값이 아니기에, 우리네 해석의 결과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나이, 상황, 시대에 맞추어 내 해석과 그에 따른 메시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 외에도, 하나의 주제가 떠올랐을 때 짧은 글로 스케치하듯 써보는 '습작'을 남기는 것도 방법이다.

이후에 그것에 대한 고찰이 무르익었을 때, 습작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글을 쓰는 것이다. 항상 강조하는 '제목 카피라이팅'과 '제목 아카이빙'도 양의 글쓰기를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제목만이라도 잘 지어서 모아두면, 그것들을 글로 재탄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글은 양으로 승부해야 한다.

양의 늘수록, 필력은 자연스럽게 늘게 되어 있다. 아직도 필력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만큼의 양을 늘리지 못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글의 양이 늘수록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고 그에 대한 용기는 커지기 때문이다.


나는 글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하기에 그 양을 늘리고 늘리고 또 늘린다.


더불어, 그 누구라도.

함께 그렇게 부자가 되기를.


글쓰기의 본질이라는 진심을 담아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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