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곳곳엔 나를 위한 글감과 사랑이 사랑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나는 몰랐다.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왜 그 분야로 전문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매일 마주하는 나 자신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에도 혼자 있을 수 없었던 자기 분열적 사고와 느낌 또한, 내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무엇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와의 동거는 그렇게 쉽지가 않다.
어르고 달랜다 한들 내 것이 되지 않고, 통제하고 억누른다 하여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삐 풀린 말처럼 제 멋대로이기도 하고, 언젠간 고삐가 풀렸으면 하지만 또 그땐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 있는 바보. 오늘의 후회가 나 스스로의 못난 선택임을 알게 될 땐, 비수의 끝은 나를 향하기까지 한다.
삶의 고통은 타인으로부터 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아픔은 자아로부터였다.
나와 행복할 때 타인과도 행복할 수 있었고.
타인과의 갈등은 고통스러운 자아로부터였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살고 싶어서였다. 앞에 한 단어가 빠졌다.
그렇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간다. 그 '함께'의 대상은 타인만이 아닌 '자아'를 내포한다. 나와 살 줄 알아야, 타인과도 살 수 있다.
나를 사랑해야 했다.
그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고 말았다. 지난날, 나를 사랑하기에 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부질없기 그지없었다. 잠깐의 소비와 순간의 유흥, 돈 주고 금세 올린 도파민의 향연은 나를 대접하는 듯했지만 실상 그 모든 건 더 큰 급락을 위한 충동적인 상승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 여러 방황을 해왔던 것 같다.
이제, 그 방법을 찾았다.
글을 쓴다.
나를 사랑한다.
글을 쓰면.
나를 사랑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면.
글을 쓰게 된다.
더 놀라운 건.
내가 미워도.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도. 지난 내 못난 선택이 오늘의 나를 후회로 괴롭혀도.
나는 그것을 글로 써낸다는 것이다.
글로 써내면, 글을 쓰면서 그 고통과 분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부터 야기된 고통을 잠재우거나 힐난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글쓰기 이후로, 내 자아를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란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이걸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재밌는 건, 알면서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이 당연한 걸 잊지 않게 해 준다.
자꾸만 그것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는 걸 계속해서 알려주고 있다. 글을 쓰는 나는 온전히 자아에 집중할 수 있으므로.
어느 대상을 사랑하려면, 그 대상을 바라볼 줄 아는 게 우선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저 밉다는 이유로 나는 스스로를 오랜 시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 세월은 글을 쓰지 않은 기간과 상통한다. 그러니, 내가 해왔던 건 스스로에게 부질없던 일일 수밖에. 글을 쓰는 시간은, 내 시선을 나에게로 돌릴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다시 한번 더 다짐한다.
여전히, 사랑하기로 한 날보다. 그러하지 않은 날이 더 길다.
앞으로의 내가 기대된다.
사랑을 듬뿍 받은 자의 삶은 어떻게 이어질까?
듬뿍 써야지.
듬뿍 그 사랑을 담아야지.
일상 곳곳엔 나를 위한 글감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일상 곳곳엔 나를 위한 사랑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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