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주문은 오늘도 내가 쓰는 글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삶의 전후를 비교할 때가 있다.
그 대부분의 기준은 나이를 기점으로 한다. 나이 들었다는 말과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그러하기 전과 후를 분명하게 나눈다.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거나, 알았다고 생각한 것이 무지(無知)였음을 깨닫는 기점도 그즈음이다.
나이가 덜 든, 그러니까 어리다고 말할 수 있는 그때는 세상에 무수한 삿대질을 날렸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건 세상이었고 타인이었다. 그것만 없으면, 그들만 있지 아니하면 내 삶이 이렇게 힘들일은 없을 거란 생각으로 가득했다. 주위 모든 건 방해요소들이었고, 눈에 독기를 가득 담아 정의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나에게 세상은 천동설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야 했고, 그러하지 않은 모든 건 적으로 규정해야 했다. 삶이 쉬웠다. 안 되는 모든 걸 나를 뺀 모든 것의 탓으로 돌리면 되었으니까. 세상과 타인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 칠 마법의 지팡이가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수 없이 했다. 그들의 머리통을 휘갈기며 주문을 외면, 나만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 들었다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차오르자, 삿대질의 방향은 나를 향해야 했다.
세상도, 타인도 어느 잘못이 하나 없었다. 정작 머리를 쳐 정신을 차려내야 하는 건 나였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관점을 옮기는데, 나는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했다. 세상과 타인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을 내가 어찌할 수 있단 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나를 방해하던 적은 내 안에 있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잘 대접하지 않음으로써 내부의 적을 강하게 키우고 있던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손가락질의 방향을 아직도 허공에 쏘아 대고 있는 나이만 든 어른들도 부지기수다. 생각해 보니 이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철이 들고 안들고의 차이는, 어느 하나의 일생일대 사건을 만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나에게 있어 그 사건은 바로 '글쓰기'다. 바꿔 말해, 나이가 어리더라도 아마도 글쓰기를 좀 더 미리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내 삶을 진작에 바꿀 어느 하나의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고로, 세상이 바뀌길 바라며 헛된 힘을 쓰던 나를 바꾼 마법은 바로 나이가 아니라 글쓰기였다.
이것을 마법이라 말하는 이유는 무언가가 한 번에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겹고 힘들고 고되었던 삶은 어느새 의미 있는 일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그 사이에 글쓰기라는 사색의 시간을 추가함으로써 경거망동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세상을 바꾸려 쓰던 힘을 나에게 쓰니 삶은 덜 고되고 내 변화와 성장은 더 커졌다는 것이다.
힘이 세다고,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좋은 게 아니라 그 힘이 올바로 쓰일 때 삶의 기쁨과 행복은 더해진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마법을 제대로 부릴 줄 알게 되었다.
그 마법의 힘은 어느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자가발전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한, 그 마법을 잃을 걱정도 없다. 결국, 나를 돌아보는 것이 내가 부릴 수 있는 가장 큰 마법이며, 그 마법의 힘은 스스로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커진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노력하는 건, 어느 한 자라도 내 생각과 마음을 내어 놓으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마법은 알아서 부려질 것이다.
누구의 뒤통수를 칠 필요 없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선사하면서.
마법의 주문은 오늘도 내가 쓰는 글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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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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