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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4. 2016

월급쟁이의 고단함

고단함에 대한 주절거림은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의 버릇이다.

먹고사는 데에 대한 고단함은 인간의 숙명이다.

아니 어쩌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숙명일 것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은 뒤로하고, 일단 먹어야 우리는 살 수 있다. 맹수부터 땅바닥의 개미까지 그들과 우리의 하루 종일 일과는 먹고사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먹으려면 먹는 것을 구해야 한다. 먹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 직접 재배하거나 사냥을 하면 된다. 또는 그에 상응하는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교환하여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린 돈이 필요하다.


돈과 삶의 고단함은 결국 월급쟁이라는 말을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이 세상은 피라미드 구조로 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계급. 그리고 상위 몇 %에 몰려 있는 부(富). 부익부 빈익빈은 아주 자연스럽고 공평한 세상의 이치다. 이것을 탓하는 것은 나보다 더 많은 '부'에 대한 부러움이자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다. 상위 몇 %에 해당하지 못하는 나는 그들이 죽도록 꼴사나워 보이지만, 내가 거기에 속하게 된다면 나머지 사람들을 얼만큼 위할지 잘 모르겠다. 상위 몇 % 는 일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하위 대부분은 그러한 일자리가 필요하다. 언뜻 공평하고 합리적인 거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상위 몇 % 와 하위의 관계는 평등할 수가 없다. 삶의 고단함은 거기에서 나온다. 아니, 월급쟁이의 고단함은.


월급은 노동의 대가로 여겨지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

애초에 받은 만큼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이상 일한 다고 해도 알아주는 것은 자신 외엔 없다. 특히 한국 사람이 한국 회사에서 일한다면 월급 이상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다. 받은 만큼 일한다면 그 사람은 로열패밀리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다.


나는 궁금하다. 어렸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월급쟁이'를 장래 희망으로 생각했을까.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현재 월급쟁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단다. 다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다고. 나도 예외는 아니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월급쟁이'는 먹고사는데 가장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다. 회사 체질이 아닌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이고. 일하는 것이 가장 싫은 사람들이 모여 삶의 대부분을 일하며 보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뭐 불행히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다. 왜 사는지에 대한 정답을 모르는 우리는 그래도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양치하러 간 욕실 거울 속 초라한 월급쟁이의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토닥여야 하는 이유다. 내가 원했던 미래는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미래는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금 하는 일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해야 할 일을 하며 교훈을 얻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일을 하며 세상의 아니꼬움을 체험하고. 그렇게 해야 할 일을 억지로라도 할 때, 그리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일을 하는 그 순간의 지옥 경험이 오히려 더 큰 경험의 선물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을 무덤이자 삶의 끝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도 좋다.

과정이라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 이 모습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며 안주하기도, 슬퍼하기도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월급쟁이 생활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것도 참 고단함을 배가시키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에겐 절실하다. 다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던 월급쟁이 생활이 끝나더라도 우리는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월급쟁이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 몰라도, 먹고사는 것은 선택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 참 고단하게도.


세상이 바뀌어 월급쟁이가 꿈인 사람들도 많이 생겨난다. 어디라도 취업해서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일지 모른다. 특히나 상위 몇 %가 아닌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보면 어쩌면 월급쟁이의 고단함을 논하는 것이 사치스러워 보일지 모른다. 맞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이, 그리고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사람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더 겸손해진다. 그리곤 고단함을 돌아본다. 고단함을 나쁘게만 본 내가 잘못한거다.


행복한 피곤감은 어쩌면 고단해야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고 3 시절 새벽까지 공부하고 도서관을 나오며 바라본 밤하늘의 별이 그랬다. 고단했으므로 행복했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는 출장길.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성취라는 이름 하에 주어진 보상. 물론, 월급 이상의 과도한 업무와 질책에 인간 이하의 초라함을 느껴야 하지만. 내 월급에, 아니 나의 노동과 고단함에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보면 고단함을 달게 받을 각오를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도 그 일에 열정을 가지고 고단함을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월급쟁이를 꿈꾸진 않았지만, 이왕 월급쟁이 된 거 최고의 월급쟁이가 되고 싶은 갈망이다.


고단함에 대한 주절거림은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의 버릇이다.

그리고 삶의 낙이다. 언젠가 더 이상 월급쟁이가 아닐 때 돌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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