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Jan 20. 2016

헬조선을 만드는 사람들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당신은 교실 맨 앞자리 또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있다.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교실 앞 칠판 아래 작은  휴지통을 갖다 놓는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공책을 한 장씩 찢고 둥글게 뭉쳐 종이 공을 만들라고 한 다음, 각자의 자리에서 그것을 던져  휴지통에 넣는 사람들에게 청소를 빼주고 일찍 집에 가게 해주겠다고 한다.


당신은 공책을 한 장 찢어 열심히 종이 공을 만든 후 어떻게 하면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맨 뒷줄에 앉은 학생이, "선생님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앞에 앉은 아이들이 더 유리한 것 아닌가요?"


자, 여기까지 읽는 동안 그리고 맨 뒤에 있는 학생이 문제제기를 하기 전까지, 당신은 '아,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이 불공평할 텐데...'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을까?


"우리들의 이중성"


우리는 보통 국회의원을 욕한다.

약속을 지키는 법도 없고, 청년 문제에 고심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기 밥그릇을 지킬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런데, 주위 친구들 중에 국회의원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뭐라고 하는가?

"와, 쟤네 집안 대단한 집안이야....!"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적인 시각을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대기업에서 소위 말해 금수저를 물고 나온 동료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주로 국회의원, 외교관, 검사, 변호사, 의사, 임원 등의 자녀들이다.


나는 분개한다. 일로서 승부를 보는 회사에서는 잠깐 공평해 보일지 몰라도, 언젠간 그들로부터 유리벽을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사무실을 벗어나면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열등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나 또한 흙수저에서 은수저, 금수저를 갈망한다. 그리고, 대기업에서 해외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는 나의 자녀들은 이미 흙수저는 벗어났는지 모른다. 인터내셔널 스쿨에 다니며 어린 나이에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흐뭇해하는 나를 발견한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너무나도 잘 안다.

남의 신경을 너무 쓴다. 조기교육이 심하다. 있는 집 없는 집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역시 한국 사람들은 말이 많다. 뒷담화가 심하다 등.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더 그렇게 행동한다.


내가 있는 곳은 해외다. 한인 게시판을 들어가보면 따뜻한 말이 오가지 않는다. 혹시라도 누가 중고 물품을 올리면 사지도 않을 사람들이 가격에 대해 왈가왈부하느라 게시판이 뜨겁다. 어떤 사람은 재능 기부를 위해 이발을 해주겠다는 글을 올렸다가, 누구 밥줄 끊을 일 있냐며 세금 안 내고 영업하는 사람으로 신고를 당했다.


리네가 그렇다.




나는 신입사원이나 대리 때, 자기 경비 처리를 후배들에게 시키는 선배를 증오했다.

이미 시대가 변해서 그러한 일들은 개인 시스템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경비를 후배에게 시킨다니.

그 얼마나 바쁘다고 그런 걸 후배에게 시킬까?


관리자가 된 지금도 나는, 내 경비는 내가 처리한다.


하지만, 요전 날 내가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아래층 후배가 경비 처리를 인턴들에게 시킨단다.


이래서 세상이 바뀔까?


"헬조선을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 모습"



헬조선의 시대다.

너도나도 사회를 탓하고 남을 탓하고  기성세대를 탓한다.

한국은 더 이상 살 곳이 못되고, 여러 선진국을 앙망하며 OECD 중 최악의 성적표를 담론으로 삼곤 한다.


하지만 진지하게 우리를 돌아보자.

하늘을 우러러, 우리 스스로가 헬조선의 원흉이 아니라고 부끄럽지 않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다시 도입부에 이야기 한 종이 공 던지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맨 뒷줄에 앉은 학생이 불공평하다는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 전까지는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아니, 그 이야기를 듣고는 "선생님, 그냥 빨리 진행해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출발선상이 다르다고 불평할 때, 우리는 이미 남보다 더 나은 출발선에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앞에 놓인 출발선을 보며 세상은 정말 더럽게도 불공평하다고 울부짖을지 모른다.

내 뒤의 출발선에 놓인 사람들은 생각도 않은 채.


그리고 한국 사람의 이중성.

유럽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의 이목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오늘 좀 튀는 옷을 입고 온 동료의 옷을 보며 수군수군 댄다.


아니, 눈치 보지 말고 휴가 좀 갈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야근은 도대체 왜 하는 거냐며 불평할 때, 후배가 눈치 안 보고 장기간 휴가를 가거나 칼퇴를 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낄지 모른다.


누군가 한국 사람은 대야에 담아 놓은 게라고 했다.

어느 한 게가 대야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면, 다른 게가 그 게의 뒷다리를 잡아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어떤 게도 나가지 못하게 된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자.

헬조선을 만들고 있는 건 누굴까?


나도 이 질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꼰대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고, 하나씩 고치고자 노력은 하면서도 거대한 시스템 앞에 순간순간 무릎을 꿇을지 모른다.


그래서 무섭다.


"내가 직장에 남아 있는 이유,
작은 것부터 바꿔보면 어떨까?"


누군가 말했다.

어렸을 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그때가 바로 어른이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던 것에 대해 무뎌지고, 나도 모르게 그것을 아랫사람들에게 그대로 행하고 있을 때.  그때가 바로 더 이상 젊음이 아닌 잘못된 어른, 꼰대가 된 것이라고.


직장은 참 고달프다. 회의도 많이 든다.

누군가는 멋있게 박차고 나가 세계 여행을 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 나간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직장에 비전이 있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발전시켜 가고 있다.

수 많은 불합리 것을 겪으며 내가 권력(?)을 가졌을 때, 그리고 올라가는 과정 중에 조금씩 하나씩 바꿔보려고 직장에 남아있다.


그래서 함께 시작한 것이 멘토링이다.

젊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의 고충을 알고, 나의 초심을 기억하며, 조언을 하다가 꼰대 로직이 나오지는 않는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곤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꾸역 꾸역이라도 난 작은 것부터 바꿔보려 한다.

그러면 난 시나브로 우리가 헬조선을 만들어 왔듯이, 언젠가 우리 스스로 후배들에게 물려줄 좋은 직장을,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너무 거창한가?

그러면, 작은 약속부터 하나 하겠다.


앞으로도 내 경비처리는 내가 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은 고통 순이 아니잖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