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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l 28. 2016

행복은 고통 순이 아니잖아요

언젠가부터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

"덜 불행해지려고 사는 걸까?"


언젠가 문득 우리는 행복해 지기 위해서가 아닌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벼랑 끝에 내몰려 나만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될 것 같다는 방어적인 생각. 아니, 오히려 저 나락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의 고통이 더 클지 모른다. 당하는 고통보다 당하기 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큰 법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한다.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한 번 삐끗하면 좀처럼 회복하기 힘든 이 시대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산층에 꾸역꾸역 편입되더라도 어차피 1%에 속하지 못하여 가축으로 취급받는 이 사회를 말이다. 더 무서운 것은 중산층에서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에 대한 공포다. 그 공포 덕분에 아직도 사회는 저임금에도 상사나 회사, 갑의 횡포에 고분고분 돌아가고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중산층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그리 어렵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고문 또한 고분고분한 사회의 큰 원동력이다.)


"행복지수로 보는 우리의 자화상,
행복순위? 아니면 덜 불행한 순위?"


 UN이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했다.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가 점수로 환산되어 있고, 순위가 매겨져 있다. '행복'이라는 것을 굳이 숫자로 표현해야 하는가에 의문은 잠시 접어본다. 상대적으로 보면 될 일이다. 우리는 어디쯤에 있나 참고하면 될 일이다. 역시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발표는 단순한 순위의 나열이나 모두가 알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을 차지하리라는 것보다는 '복지 분배 불평등'이나 '부정부패'등의 항목이 추가, 반영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역시 북유럽 국가들은 상위권에 있는 반면, 한국은 15년 47위에서 16년 58위로 떨어졌다. 체감상으로 보면 기대보다 선방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유쾌하진 않지만.


출처: http://worldhappiness.report/ed/2016


상위권의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삶에 대한 선택권의 자유', '너그러움'과 '부정부패' 항목에서 특히 열세를 보인다.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저 결과와 등수를 '세계에서 가장 덜불행한 나라'의 순으로 곱씹어본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100% 행복한 사람이나 나라는 없다는 데에서 얼토당토 한 생각은 아니란 고집이다. 그럼에도 우리 등수는 결코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다시, '덜 불행하다는 것'은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쟤보다 덜 불행하면 돼"


만화로 세계사를 그리는 한 교수가 말한 흥미 있는 비교가 여기 있다. 일본은 예로부터 섬나라였기 때문에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 문화가 발생했다고 한다. 즉, 섬나라에서 서로 싸우면 자멸할 것을 알기에 일부 정치권들의 싸움을 제외한 보통 사람들은 서로에게 조심한다고 한다. 즉, '스미마셍'문화가 생긴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머리를 조아리며 '스미마셍'을 외친다. 지독한 욕 이래 봤자 '빠가야로'가 전부다. 반면, 한국은 반도에 위치해 침략을 많이 받았다. 공동체 문화일 수밖에 없었다. 힘을 합쳐 어려움을 타개해 나간 순기능은 있지만, 반대로 공동체 문화였기 때문에 튀면 안 되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도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개인의 행복보단 공동이 덜 불행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개인이 행복하면 공동체로부터 눈총을 받는 구조다. 공동체의 행복 지수보다 개인의 그것이 더 높은 경우는, 또는 그렇게 보이는 경우는 특별히 더 그렇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덜 불행하려고' 사는 것이 극명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비교한다. 어렸을 적 친척집을 방문하면 친척들은 동갑인 사촌과 그렇게 서로 키를 재게 했다. 그 어린아이 둘을 등 대게 맞춰 놓고는 어른들끼리 비교하고 안도를 하거나 실망을 하곤 했다. 내가 남보다 조금은 더 나아야 성에 찬다. 즉, 적어도 다른 사람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로새겨져 있다. 결국, '저 사람보다는 내가 좀 낫다', 내지는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덜 불행하니 힘내자'라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저 모두 다 행복하면 안 되는 것일까? 우리는 서로 덜 불행함을 도토리 키재기 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는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절대.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것"


여기 주재원으로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나는 그러한 차이점을 더욱더 느낀다. 한국에 있을 땐 그저 그러한 인식에 감염되어 있어 나조차 몰랐다. 나와보니 더 잘 보인다. 우리의 특성과 모순을. 지금도 무작정 유럽을 동경하거나 찬양하지는 않는다. 한국인도 한국사람 특유의 장점이 있고 여기 친구들도 그러한 점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다만, 한국 사람은 '행복'보다는 '일' 그리고 '질'보다는 '속도'를 지향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행복한 (그리고 덜 불행한 순위로 아래에서 일곱 번째 인) 이곳은 정말 확연히 다르다. 개인의 행복이 곧 전체의 행복이다. 개인이 행복해야 공동체가 행복하고 집단이 발전하며 나라가 굴러간다는 생각이다. 모든 복지는 개인의 행복과 약자를 위한 지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더불어, 직업에 귀천이 없고 맡은 바 각자의 일에 충실한다. 적게 벌면 세금을 조금 내고, 많이 벌면 세금을 많이 내고. 정부에 대한 믿음으로 서로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슈퍼마켓의 캐셔도, 식당에서 서빙하는 직원도 무시받는 일 없이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여름이면 3주 간의 휴가를 마음껏 즐긴다. 왜 행복한지 또는 덜 불행한지 몸소 체험한다. 내가 쟤보다 낫다고 더 행복한 것이 아니다. 즉, 그들에게 행복이란 비교의 대상이 아닌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확고한 믿음"이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가 본다. 그리고 반성한다. 나라가 잘못되었다. 한국 사람은 이게 문제다. 헬조선이다 뭐다 하는 말들. 결국 나는 한국 사람이고 유럽과 같은 삶을 동경하면서도 결국 나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 헬조선이라 부르는 지금의 우리 모습. 그 헬조선을 만드는 사람은 누굴까? 바로 우리다.

("헬조선을 만드는 사람들" 글 참조)


우리의 정서에 아로새겨진 '집단 무의식'은 어쩔 수가 없다. 그 피가 흐르니 유럽의 그것을 동경하면서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이유다. 내가 변하지 않으니 무엇이 바뀔까. 칼퇴근을 부르짖으면서 후배가 칼퇴근하면 욕하고,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가타부타하고, 나보다 행복한 남을 보았을 때 축하하기보단 깎아내릴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지 날 선 시선으로 보고 있진 않은지. 회사 내 누군가 여름휴가를 2~3주 간다고 하면 책상을 빼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 반 진담 반 하는 우리네 사회에서 말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행복을 재정의해보자."


그럼에도 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정부나 환경, 저성장 시대를 탓해봐야 변할 건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부터 바꾸어 나가보자는 것이다. 나조차도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정신줄을 붙잡고 있고, 물보다 진한 한국인의 피는 유럽의 삶을 100% 답습할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찾아야 한다. 한국인의 장점은 살리고, 우리 실정에 맞는 삶의 방식을. 사회의 시스템이, 환경의 부적절함 속에서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는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방종이 아닌 자유를, 무조건적인 반항이 아닌 생산적인 개선을. 나부터 다른 사람의 행복을 용인하고 그 하나하나의 행복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믿음을 지금이라도 가져 나아가야 한다.


돌아보면 어쩌면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그저 '쟤보다 덜 불행하면 돼'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 네덜란드 사람들을 보면 '행복'이란 매우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네에게 '행복'이란 객관적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남들로 하여금 부러움을 사야 하는 그 무엇. 주입식 교육과 천편일률적인 교육의 결과일까? 우리는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도 줏대가 없는 것이다. 수능시험 만점 맞아도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피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이제는 행복을 재정의할 때다. 그렇다고 판에 박힌 답을 내놓고 싶진 않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행복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연습해야 한다. '주관적'인 행복을 당당히 내세워야 한다. 대기업 다니며 외제차 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행복한 거다. 그런 사람을 보며 깎아내리지 말자. 깎아내리는 순간, 그런 것은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본인은 더 불행해진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도 행복이고, 궁합이 잘 맞는 우유와 쿠키를 한 입에 털어 넣는 것도 행복이다. 그저 인정하자. 주관적으로 받아들이자. 내가 행복하면 나라가 해복해질 수 있는 그 날을 향해 나아가자.


덜 불행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우리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 그리고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며 위안받기보다는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것. 아니면 아예, 남의 행복에 관여하지 않고 내 행복에 집중하는 것. 비교하고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아파하지 않는 것.


그랬으면 좋겠다. 일부 기득권들의 부패와 타락을 보며 혀를 차기보단 내 행복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가 기득권을 쥐었을 때, 안 그러리라는 보장이나 있을까? 그들도 그들의 행복에 집중했을 뿐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거나 상식을 벗어난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어야 한다. 나의 행복이 남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주관적 행복'이 아니라 '죄악'이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다고 우리들 고유의 주관적 행복에 상처를 입진 말자.


그러니 우리 함께 행복하자. 덜 불행해지려 하지 말고.

행복은 고통 순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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