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불문하고 우리가 젊다면
둘째 녀석이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고 와이프와 나는 동물적으로 그 낌새를 알아차려 벌떡 일어나 막 토사물이 나오는 둘째 아이의 입에 손을 갖다 댔다. 자신이 왜 그런지 영문도 모르는 이제 막 6살이 된 둘째 녀석은 서럽게 울어재꼈다. 울면서도 토악질을 하는 그 가련한 작은 몸뚱이는 바르르 떨렸다. 그것을 느낀 나는 부모로서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다. 정말 아팠다. 새벽 햇살이 평소보다 더 밝은 유난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렸을 적 어머님께서 내게 해주시곤 했던 말을 곱씹고 둘째 녀석에게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아플 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괜찮아, 크려고 그러는 거야."
온몸을 바르르 떨며 토악질을 하는 둘째 녀석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말을 그대로 전하는 거였다. 돌이켜보니 내 어릴 적 아팠던 그때, 어머니의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쩐지 위로가 되곤 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둘째 녀석도 나와 같은 걸 느껴서일까. 뭔지 모를 고개를 끄덕이며 이른 아침 다시 잠을 청했다.
아픈 것과 크는 것이 서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크기 위해 아파야 할 의무도 없다. 다만, 우리는 아플 때도 있고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커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여기까지가 생물학적 해석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다른 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픔'과 '성장'은 비단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들도 하루하루 아프고 성장해간다. 어릴 적과 다른 것은 아픈 것과 크는 것이 가끔은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아픔'은 '깨달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장'은 이런 '깨달음'을 발판 삼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절대적으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독이 바짝 오른 사람이나 정말 처절하게 급박한 사람에게 농담이나 어설픈 말의 위로는 곧이 들리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위로는 '아프면 환자지 그게 청춘이냐?'라는 비아냥으로 왜곡되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낭만이 없어 낭만이'라는 기성세대라 쓰고 꼰대라 읽히는 사람들의 말에, 정말로 낭만을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돌아봄 보다는 성토를 일삼는다. 정말로 아프기 때문이다. 아프기만 하기 때문이다. '요즘 것'들에 대한 성의 없는 타박은 아픈 청춘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와 멍울을 안긴다.
기성세대들에게 낭만을 떠올리라고 하면 장발머리에 미니스커트, 학생운동으로 점철진 호기로운 대학생활일 것이다. 그 와중에 사랑도 하고 통기타로 낭만을 노래했다. 그리고 세상을 일구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이들이 바로 '요즘 것' 내지는 '젊은것들'이다. 이것은 비단 386세대를 거쳐 X세대와 Y세대, Z세대 등과 같이 알 수 없는 알파벳의 나열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고대 벽화에도 '요즘 것들은 글러 먹었어'란 말이 분명하게 쓰여있다. 요즘 20대에게 10대들에 대해 물으면 열에 아홉은 말한다. "아우, 요즘 애들은 저희와 또 달라요."
그렇다. 반대로 기성세대는 우리와 다르고 그때는 또 달랐다. '낭만'이 있긴 있었다. 누가 만들지 않아도 성장의 시대에는 그랬다. 요즘 우리는 그때보다 더 잘 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넘쳐난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저성장 시대라는 것이다. 예전엔 지금보다 못살았지만 성장의 시대였다. 르네상스도 '성장의 시대'에 기반한 문화적 결과였다. 그러니 '요즘 것들은 낭만이 없어'라는 말은 그만해야 한다. '요즘 것'들이 낭만을 안 가지거나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요즘 세상에 '낭만'이 없기 때문이다.
"빚이 있어야 파이팅한다!"라는 말을 그 누구도 아닌 어느 한 장학재단 이사장이 말해 또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픔만을 가지고 있는 청춘들에게 이러한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의도는 알겠다. 나도 어렸을 적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빚쟁이들에 쫓겨 월세방을 전전긍긍한 적도 있고, 취업 전에 가족의 경제 사고로 인해 나 홀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던 적도 있다. 삶에 오기가 생기고 사람이 더 독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힘을 내는 '파이팅'이 아닌, 정말 '파이팅(싸움)'으로 기진맥진했다. 그것은 사투였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예전보다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있다. 더불어 기성세대들이 했던, 정말로 1차적인 배고픔에 따른 먹고사는 문제에서 많은 해방이 있었다. 기성세대는 그래서 더 젊은 이들을 훈계하려 들렸는지 모른다. 배고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렇다. 요즘 세상은 배고픔이 제 1순위의 고민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요즘 청춘들의 고민은 새롭게 창출되고 있다. 기성세대의 고생과 요즘 세대의 고생의 모습이 다를 뿐이지, 고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시대를 탓하며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우리보다 후배인 친구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지는 않은지. 기성세대의 꼰대 기질을 욕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쩌면 세상이 너무나도 쉬워졌을지 모른다. 개인이 노력하지 않는 것도 세상을 탓하면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되고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정말 심각한 개인의 '저성장'에 발목 잡힐 수 있으니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불합리한 것을 나의 '변명'과 '구실'로 삼으면 안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낭만'을 찾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지 모른다.
앞서 '낭만'이 없는 시대라 말했다. 사실 '낭만'은 어디에나 있다. 고리타분하지만 '낭만'의 뜻을 다시 한 번 보면 알 수 있다.
낭만
1.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
2.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
즉, 우리는 '낭만'을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인데도 말이다. 멍울이 진 우리네 아픈 마음에서 '낭만'을 찾기란 여간 어렵다. 또는 간혹 그것을 알아차렸더라도, 어쩌면 지금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낭만'을 찾아야 한다. 추구해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러할 자격이 있다.
우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젊기 때문이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둘째 녀석은 형이랑 자전거를 탄다며 우당탕탕 뛰쳐나갔다. 어쩐지 다른 날보다 조금은 더 커 보이는 녀석이다. 정말로 아파서 더 큰 건지, 아니면 커가는 중에 아팠던 건지. 녀석도 그러고 보니 '요즘 것'들 보다 더한 '요즘 것'이다. 이미 이 녀석이 살아갈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배고픔은 애진작에 해결되었지만 '헬'이란 말이 나라 이름 앞에 붙여진, 그 단어가 단시간 내에는 쉽사리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세상에 태어나고 말았으니 앞으로 두 녀석의 인생은 참으로 다이내믹하리라. 나와는 다른 고민을 하게 될 그 두 녀석에게 내가 고민했고, 겪었던 것들을 강요하면 꼰대로 낙인찍힐게 뻔하니 그런 말도 못 하겠고. 다만, 두 녀석이 각자의 삶에서 '낭만'을 찾았으면 좋겠다 싶다. 안 되는 것들이 그저 세상의 탓이라 여기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또 세상에 기인한 탓이 있다면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는 그 용기도 함께. 어려운 세상에 태어나게 해 놓고 많은 것을 바라는 것임을 알지만 어쩌랴. 그것이 두 녀석에게 주어진 숙제이자 운명, 그리고 '낭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