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이냐 짬뽕이냐에 버금가는 고민거리가 있다.
고기를 먹고 난 뒤다.
물냉면이냐, 비빔냉면이냐.
슴슴하지만 짭짤한 국물을 개운하게 들이켜고 싶다는 마음과, 맵고도 달콤한 양념이 배인 면을 한 입 가득 넣고 싶다는 욕망 사이.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사람들은 방황한다. 결정 장애를 가진 어느 왕이 고민했던 죽느냐 사느냐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무게다.
그러나 어느새부턴가 이러한 고민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다.
비빔냉면을 시킬 때 함께 나오는 육수 때문이다. 사람들은 육수의 양을 조절하며 비빔냉면과 물냉면의 경계를 허문다. 아니, 그 경계에 서서 그 둘 모두를 즐기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물냉면도 뒤질 새라.
비빔냉면에 들어가는 양념장을 따로 달라고 하면, 마찬가지로 그 경계를 만끽할 수 있다.
물냉면도 아니고 비빔냉면도 아닌.
무어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는 그 음식 앞에서, 사람들의 고민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누구였을까.
비빙냉면을 내어오며 충분한 육수를 주자고 생각한 사람은. 어디서 생겨난 지 모르지만, 우리네 생활을 아우르는 어느 신조어처럼 시나브로 육수와 함께 나오는 비빙냉면은 이미 우리네에게 익숙한 무엇이다.
나는 이 경계의 허물어짐이 매우 반갑다.
이 세상은 너무나 이분(二分)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과 여. 노인과 젊은이. 우파와 좌파. 남과 북... 심지어는 찍먹과 부먹까지.
사람들은 편을 가르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배척한다.
아이러니한 건, 개개인은 이 편이기도 하고 저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있을 순 없다. 그런데, 한평생 어느 한쪽에만 있을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면 우둔하기 짝이 없다.
찍먹이라 하면 부먹하는 사람들의 미간이 찡그려지고.
부먹이라 하면 찍먹하는 사람들은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세상이 왜 이리되었을까.
찍먹으로 먹고 싶은 날도 있고 부먹으로 먹고 싶은 때도 있을 텐데.
아니면, 반은 붓고 반은 찍어먹으면 되는데 말이다.
'이분(二分)'은 상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상대방을 규정하며, 이 개념은 변질되고 오염되었다.
나는 둘로 나뉜 세상이 무섭다.
나 또한 어느 한쪽에 서서 다른 쪽을 경멸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새삼 조심스럽다. 누군가에 대한 경멸은 조급하고 경솔하다. 나는 조급하고 경솔함을 경멸한다. 그렇게, 경멸하는 상대가 내가 될까 나는 두려운 것이다.
혹, 어느 한쪽으로 너무나 치우쳐 누군가를 경멸하고자 하는 욕구가 차오를 때.
나는 비빔냉면과 육수를 함께 먹으려 한다. 육수를 한가득 부어, 이것이 물냉인지 비냉인지 모르겠는 그 애매함의 경계에 서서 나와 내 주위 모두를 돌아보려 한다.
차가운 국물이 이성을 되찾게 해 줄 것이고.
매콤 달콤한 맛이 기분을 풀어줄 것이다.
물냉과 비냉의 경계가 사라짐을 격하게 반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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